[부산기업 스토리] ② 한진중공업
정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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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번지.
한진중공업에 들어서면 길이 100m 크기의 독 벽면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NO.1 DOCK'.
한국
최초의 선박 건조장이라는 뜻이다.
도크가 말해 주듯 한진중공업의 뿌리는 1937년에 문을 연 '조선중공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미쓰이 물산이 중·일 전쟁 특수를 노리고 설립한 회사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회사로 지정돼 군함수리 물량이 10배나 증가하고
직원 역시 450여 명 선에서 순식간에 4천 명을 초과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인력이 갑자기 늘어난 배경에는 군수업체에 취업하면
징용이 면제되는 제도가 한몫을 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뿌리
숱한 시련 딛고 부산을 지켜와
하지만 8·15 해방을 맞으면서 모든 것이 올 스톱됐다.
미군정이 초대 관리인으로 회사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경찰 출신 박상길 씨를 선임한 데 이어
2대 관리인까지 건축공사장에서 십장 노릇을 하던 김재련 씨를 임명하는 등 혼란이 계속됐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조선공사'라는 국영기업으로 바뀌었지만 수리에만 치중할 뿐
신규건조는 꿈도 꾸지 못했다.
대한조선공사가 정상화된 것은 1968년, 민영화 조치 이후였다.
첫해에 대만으로부터 참치잡이 어선 20척을 수주한 데 이어 이듬해엔 미국 걸프사로부터
2만t급 유조선 6척을 주문받는 쾌거를 올렸다.
그 여세를 몰아 1973년에는 경남 거제시에서 100만 평 규모의 옥포조선소 건립 사업에 돌입하는 등
확장을 거듭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런 대한조선공사에 제동을 건 것은 1978년 2차 오일 쇼크였다.
극심한 인플레에 선복과잉이 겹친 장기 불황으로 건설 중이던 옥포조선소를
대우조선(현 대우조선해양)에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노르웨이 선사가 주문한 선박 인수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여파로 유동성 위기에 몰린 1987년 4월, 대한조선공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후속조치로 실시한 공매를 통해 거듭난 회사가 오늘의 한진중공업이다.
이후 필리핀 수빅조선소를 건설하는 등 해외진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노사분규에 직면,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몰려드는 등 시련도 많았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묵묵히 성장을 거듭하며 부산을 지켜 온 향토기업이 한진중공업이다.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뿌리'라는 자부심을 안고서.
정순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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