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부산기업 스토리] ③ 동명목재

금산금산 2014. 12. 27. 14:29

'동명목재'

 

 

 

 

 

동명목재는 부산에 뿌리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공장이었다.

1970년대에는 7년간 수출 1위 자리를 고수했을 정도로 견실한 기업이었다.

그런 동명목재도 시작은 미약했다.

빈농 출신인 강석진 회장이 1925년, 일본 사람이 경영하던 가구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모은 돈 400원을 밑천으로 동구 좌천동 가구 거리에 문을 연 동명제재소가 그 효시다.

동명목재에게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것은 6·25전쟁이었다.

부산에 기반을 둔 덕분에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동명목재는

전후복구 사업과 더불어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땔감 부족으로 산림이 황폐해진 1959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인도네시아 산 원목을 수입기로

사업 방침을 바꾼 것도 행운을 불러왔다.

1961년에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벌목금지' 조치를 내린 것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 합판회사
신군부 강압으로 흑자도산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동명목재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전 세계에 자원민족주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부터였다.

원목 가격이 불과 4년 사이에 4~5배나 폭등하면서 국제합판시장이 극심한 불황으로 치달은 것이다.

여기에다 1977년에 건립한 동명불원이 '호화분묘' 시비에 휘말리는 악재까지 겹쳤다.

그 와중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였다.

정권교체를 추진하던 전두환 세력이 충격요법으로 추진한 악덕기업 정리 작업 대상에 동명목재가 포함된 것이다. 호화분묘 시비가 빌미를 제공했으리라는 분석이다.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던 1980년 6월 8일, 보안사에 끌려간 강 회장은

2개월 만에 경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명목재의 자산이 무려 730여억 원에 달한 데 반해 부채는 530여억 원에 불과했다.

수치상으로 보아도 명백한 흑자도산이었다.



그로부터 28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난 2008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강석진 회장이 경영권 포기각서를 쓴 것은 신군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며 동명목재 등 전 재산을 강탈당했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동명목재의 마지막은 이토록 불운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동명목재의 불운이 강 회장 한 사람뿐만 아니라

부산지역 경제 전체의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정순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