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부산기업 스토리] ① 조선방직

금산금산 2014. 12. 13. 18:40

[부산기업 스토리] ① 조선방직

 

 

 

 

조선방직㈜은 부산진구 범일동 자유시장 일대에 있던 동양최대 규모의 면방직 회사였다.

 '조방 앞'이라는 이름도 옛날 조선방직이 있던 자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1917년 일본 미쓰이 재벌이 설립한 조선방직은 종업원이 3천여 명에 달했다.

당시 부산지역 전체 노동자가 1만여 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 비중을 알고도 남는다.

조선방직은 8·15 해방과 더불어 민족기업으로 변신했다.

1945년 11월, 조방관리위원회가 발족되고 하원준 씨가 초대 관리인으로 선임되면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자 군납을 70% 이상 독점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다.

그런 조선방직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1951년 9월 제 5대 관리인으로 강일만 씨가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강 씨는 191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독교청년회 일로 잠시 구속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무직자에서 일약 조선방직 관리인으로 선임된 강 씨는 군납 대금 입금을 지연시키다

노사 분규를 불러오는 등 부실 경영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강 씨의 동서와 처남이 전무 및 상무로 있으면서

주도권 다툼을 하는 내분까지 겹쳐 회사가 빚더미에 올랐다.  


 
동양 최대 규모 면방직 회사
부실·족벌경영 내분 겹쳐 도산

 

 
 


우여곡절 끝에 삼호방직에 인수되었지만 화학섬유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 졌다.

그런 조선방직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1968년 4월 부산시가 발표한 '조방 부지 재개발 계획'이었다.

 시 예산으로 조선방직과 인근 부지를 사들여 시청사와 시외버스터미널 등을 건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재개발 계획은 발표한 이후 한 달도 채 안 된 5월 1일, 조선방직 회사 마당에서 기공식이 열렸을 정도로

전격적으로 진행됐다.

기공식이 열리던 날 조방노동자들은 방적기를 돌리면서 창밖으로 행사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행정당국의 '밀어붙이기'식 재개발 계획으로 조선방직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재개발 사업 또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시청사는 결국 들어서지 않았고 그 부지는 수년 동안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부산시민들의 대표적인 일자리였던 조선방직은 그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시민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조방 앞'이라는 행정구역에도 없는 지명과 함께...

 

[정순형의 부산기업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