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부산 매력 ] 흰 여백의 공간, '동결의 땅'을 녹이다

금산금산 2015. 4. 8. 08:13

'동결의 땅'을 녹이다

 

 

 

비움과 채움의 오묘한 경계선

하얗게 트인 화랑에 적절한 긴장감…사진미술관 하얀 벽은 작품 배경인 듯

 

 

 

 

조현화랑. 사진 제공=이승헌

 

 

 

 

 

서울 아라리오뮤지엄을 다녀왔다.

이곳은 원래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설계사무소인 '공간사옥'이었던 건물이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 박수근이 있다면, 그에 필적하는 동시대 건축가가 김수근이다.

김수근이 설계하고, 그의 사무소이기도 하였던 이 건물은

일반인에게는 벽돌과 노출 유리, 한옥이 대비되어 유명하지만, 사실 그 내부 공간감이 훨씬 뛰어나다.

불행히도 얼마 전 부도에 의한 공매를 거쳐 사설 미술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공간'의 의의를 잘 아는 이가 주인이 되어 내외부를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


티켓팅까지 해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전시된 작품을 보기보다는 모든 가구와 장식이 제거된

공간사옥의 속살을 만질 수 있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구석구석 한 군데도 빠짐없이 보고 만지고 음미하였다.

벽돌과 나무의 질감이 전하는 깊이감, 좁혀졌다 확장되었다 올라섰다 내렸다 하는 공간의 역동감,

쪽창과 들어열개창, 무프레임창 등이 전하는 내외부의 소통 등이

모두 무한한 사랑의 발로임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결을 엮어가는 설계자의 안목 앞에 숨죽인 탄성과 함께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런데 공간에 대한 애정이 어린 시선을 자꾸 작품이 앗아갔다.

예상치 못한 훌륭한 전시기획이었다.

백남준의 작품을 비롯한 키스헤링, 마클레이, 신디 셔먼, 피에르 위그, 권오상, 이동욱 등의 원작이

강렬한 아우라와 함께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각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흰 여백의 공간으로 번져 나온 메시지는 메아리와 같이 나즈막한 소리로 내 귀를 때린다.

쉽게 드러나 있지 않은 일상의 내면을 찢고 들어가 속엣것을 보여주려 한다.

순간 얼어붙어 있던 내 일상에 금이 가고 미세한 바람이 들어온다.



일상의 빡빡함이 느껴질 때 가끔 갤러리를 찾아보자.

딱히 그림에 감동하기 위해 혹은 뭘 표현하려는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위해서 방문하는 것이다.

작품 앞에 그냥 가만히 서 있다 보면, 꾸물꾸물 프레임을 벗어나 흰 여백의 벽을 타고 담쟁이처럼 삐져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들리지 않더라도 들리는 척하고 있으면 된다.

한 군데에서 들리지 않으면 마음 비우고 또 다른 자리로 옮기면 된다.

그러기에 딱 좋은 곳이 해운대 일대와 달맞이언덕의 갤러리촌이다.

그중 가장 전달력이 좋은 두 곳을 소개한다. 

 

 




■ 백자같이 풍성한 흰 벽-조현화랑

조현화랑은 해운대 달맞이언덕길 오르막의 휘돌아가는 정점에 있다.

주변에는 하루가 다르게 개성 넘치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전면에는 송림과 바다가 한눈에 펼쳐져 있는

매력적인 장소이다.

건물은 콘크리트와 유리로 마감된 정방형 형태의 정갈한 디자인이라 주변 맥락에서 전혀 튀지 않는다.

우쭐댐이 없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양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하얗게 칠해진 넓은 벽에 창으로는 빛이 들고 천장의 광창이 더해져 공간은

마치 백자를 대면하는 듯 풍성한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거기에 더해 공간에서는 각기 다른 너비와 높이의 변화로 밀도의 차이를 줌으로써,

관람자와 작품 사이에 적절한 긴장감이 감돌게 하였다.



음표와 음표 사이의 간극과 떨림으로 아름다운 멜로디가 완성되고,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벌어짐과

뉘앙스에 의해 아름다운 문장이 완성되는 것처럼, 화랑의 '벽'과 '공간의 밀도'와 '창'은

여백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 직조되어 있다.

적절한 거리와 수직 볼륨으로 내밀한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동선과 시선의 흐름에 변화를 주어 응시와

사색의 에너지가 활성화되도록 한 것이다.

거기에 창을 통한 극적인 장치는 잠재되어 있던 의식과 정서를 한순간에 열어주는 매개가 되고 있다.


위아래층을 오르내리며 사색이 깊어질 즈음, 화랑과 연결된 통로를 통해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 반'은 조현화랑에서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기획전시에 맞추어 카페의 벽면에도 작품이 내걸리니

갤러리카페라 할 수 있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면은 반원형 곡면 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의 낭만을 만끽하려는 손님들로

자리는 언제나 만석이다.

 

 



◇ 조현화랑

위치 : 부산 해운대구 중동

규모 : 지상 4층

시설 : 전시실 사무실 집무실

문의 : 051-747-8853

http://www.johyungallery.com


고은사진미술관 신관·본관. 사진 제공=이승헌

 

 


■ 흰 박공지붕 아래-고은사진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은 두 곳이다.

해운대시장 부근의 기존 본관과 2013년 2월에 새로 생긴 수영로교회 인근 신관이 있다.

본관이 현대미술의 측면에서 사진을 전시 기획하는 것과 달리

신관에는 사진의 기록성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 중심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우선 본관인 '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은 고은문화재단 소유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크지 않은 전시공간이다.

원래 전시공간의 성격이 아니던 지하 1층은 벽이 구획된 그대로의 상태를 아기자기하게 활용하고 있으며,

1층은 인포메이션과 카페 겸 대표작품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2층에는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본격 전시가 이루어진다.

특히 2층 전시공간의 홀을 활용한 '사진이 있는 작은 음악회'는 매년 10여 차례 열린다.

 

 

신관인 '고은사진미술관'은 적벽돌 외벽에 초록 담쟁이가 더부살이하고 있으며,

입구 쪽으로는 '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를 대면하고 있다.

1층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면에 세계 사진사가 연표로 정리되어 있고,

오른쪽으로 아트샵과 인포메이션이 개방적으로 이어져 있다.

창밖 초록의 그림자가 유리에 투과되는 계단실을 오르면

박공 천장 아래 흰색과 회색 벽으로 된 전시공간에 당도한다.

워낙 정갈한 공간에 작품을 향한 레일조명이 잘 되어 있어 여유로운 작품 감상에 최적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목재 덱이 있는 야외 테라스 벤치에 앉아 잠깐의 심호흡도 해보자.

인근 숲의 새소리와 흙 소반에 담긴 꽃의 하늘거림이 마음을 위로한다.

개관 기념으로 '구본창'전을 기획한 것을 필두로,

지금까지 서울의 작가들은 물론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하고 있다.

이번에 막 끝난 랄프 깁슨(Ralph Gibson)전 역시 많은 이에게 찬사를 받았다.

배경과 인물의 오묘한 경계선으로 인해 인체가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 작가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전시공간은 작품의 배경이요 경계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작품의

여운이 길게 남도록 하고 있다.



◇ 고은사진미술관 신관·본관

위치 : 부산 해운대구 우2동·중1동

규모 : 지상 2층·지하 1층, 지상 2층

시설 : 전시실 세미나실 수장고 등

문의 : 051-746-0055·744-3924

http://www.goeunmuseum.kr


동명대학교 실내건축학과 교수 yein1@tu.ac.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