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에 떠있는 섬마을'을 가다
그대로 두어라 세월이 쉬도록…
매축지마을. 사진 제공=이승헌 |
- 하늘 향해 파르르 떠는 나뭇잎, 담장 위 기어다니는 고양이, 골목에 내놓은 장독·화분·고무대야, 색 바랜 양복점…질펀한 삶의 흔적들
선착장에 배가 강하게 부딪히고 밧줄로 선미를 묶은 다음, 섬으로 들어선다.
뭍과 같은 땅이건만 여기서는 왠지 모를 생경함으로 어지럼증이 스친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발을 내딛다 보면 낯섦과 친숙함 사이의 긴장이 감돈다.
외지인이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현지인들은 별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이다.
바람을 타고 바다 내음과 마을의 밥 짓는 냄새가 뒤섞여 코를 간지럽히고, 골목에 나와 노는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 풋풋함을 더한다.
이런 섬의 정서를 도심 속 마을에서 느낀다.
이곳에 가면 마치 섬에 온 듯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주변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에 온 것을 느끼게 된다.
1, 2초의 시계바늘이 매우 느려지며, 평상시의 날선 눈도 한층 누그러진다.
담벼락 틈을 비집고 나온 풀이 보이고, 하늘을 향해 파르르 떨리는 나뭇잎이 보이고, 느릿느릿 담장 위를
기어 다니는 고양이가 보인다.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겹고, 동네어귀에서 놀던 아이들은 외지인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아저씨 여기서 뭐하세요?"
■ 바다를 매립해 다시 섬이 된 '매축지'
'매축지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부둣가 화물을 이송할 목적으로 대대적으로 매립해 만든 땅이다.
당시에는 말과 우마차가 대기하던 동네였다.
한국전쟁과 함께 밀려들어온 피란민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되면서 빈틈없이 빼곡히 집들이 들어선
지금의 형태로 개조되었다.
앞뒤로 지나가는 철로와 컨테이너도로, 고가도로 등으로 인해 동네는 도시의 흐름에서 완전히 단절된
도심 속 섬으로 남았다.
한때 상권을 형성하던 식육점과 양복점, 이용원, 세탁소, 의상실, 약국 등은 색이 바래고 낡아 남루해 보인다.
적어도 30, 40년은 더 되었을 법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껴있다.
시간이 동결된 채 근대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의 풍경은 하나의 대형 세트장 같아 보인다.
실제로 영화 '친구'에서도, 원빈이 주연한 영화 '아저씨'에서도 여러 신의 배경이 되었고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도 로케이션 되었다.
마을은 가로세로의 격자형 구획에 미로같은 골목이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다.
판잣집이거나 시멘트벽으로 된 집들이 1, 2m의 좁은 골목을 끼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서너 평에 불과한 집은 골목에서 미닫이문만 열면 바로 거실이고 안방이다.
골목에 내놓은 장독, 화분, 고무대야, 연탄통 등 온갖 세간들로 남의 집 내부에 들어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집 담벼락에는 시래기와 분홍색 내복이 바람을 맞고 있다.
곳곳의 폐가와 공가는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칙칙함을 감추려 새로 한 페인트칠로 인해 그나마 생기가 돈다.
다만 지나치게 설익은 벽화 등 외지인을 끌어들이기 위한 인위적인 조작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한다.
멈춰버린 시간의 깊이와 삶의 투박함 자체만으로도 이 동네는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골목을 헤매다가 만난 뜻밖의 공중화장실이나 체육공원이 반갑고, 빈터를 활용한 주민 공동의 텃밭이나
빨래 건조대도 정겹다.
빈집을 보존해 옛 마구간을 재현해 놓은 곳도 꼭 찾아볼 만하다.
최근 매축지문화원이 새로 생겨 안내센터 겸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토박이 노인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들을 많이 운영하고, 외지에서 찾은
방문객들에게도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길 바란다.
■ 능선으로 둘러싸여 조용한 '물만골'
물만골. |
'물만골'은 황령산 자락 중간 분지와 계곡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마을로,
'물이 많은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 동구 초량동 매축지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도시 저소득층과 농촌 이주민이
모여 살아온 달동네다.
마을에서 내려다보면 시청 주변에 우후죽순 들어선 건물들이 펼쳐져
보이지만, 여기는 슬레이트와 판잣집 마을이 능선에 둘러싸인 천지간
조용한 다른 세상이다.
이 마을이 특히 주목받은 것은 1990년대 말 주변의 재개발 압박에 맞서
지역 주민들이 일대 부지를 공동 매입하여 거주권을 지켜내었다는 점이다. 이때 형성된 공동체의식으로 경제적 자립기반을 만들고자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부방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2002년에는 생태복원 및 쓰레기 배출없는 마을만들기 운동으로 '자연생태마을'로 지정받기도 하였다.
마을의 집과 길을 보면 어렵게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마모되고 벌어진 벽에는 덕지덕지 다양한 재료가 붙어 있고,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태풍을 대비한
벽돌이나 타이어가 얹혀 있기 일쑤이다.
경사지형에 위험스레 기둥을 세워 방을 하나 더 달아내기도 하였다.
그때 그때의 필요를 여유가 생기는 대로 메워 가면서 살아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길을 따라 걷다보면 도심지 주택에서 느낄 수 없는 내향적 기운이 전해진다.
질펀한 삶의 냄새가 난다.
집들은 서로 어깨동무하고 있으며, 아랫집 축담 위에 걸터 앉아 있기도 하다.
담도 없고 울도 없이 서로 엉켜있고 열려있다.
빨래줄은 길에서 나부끼고, 각종 생활 집기들도 부끄럼 없이 나와 있다.
작은 평상에서 이웃끼리 두런두런 생활 얘기를 나눈다.
오밀조밀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반갑기만 하다.
달동네의 재개발 문제를 소재로 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1번가의 기적(2007)'이
이곳을 주무대로 찍었을 만큼 마을구조에 매력이 넘친다.
■ 섬마을에 다리를 놓지 말자
쾌속 질주의 일상 속에 잠깐 도심 속 섬마을에서 느리게 가는 시간을 체험해 보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다.
사는 곳을 허락없이 기웃거리고 카메라를 들이밀어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조심하며
친근한 마음으로 동네를 둘러보고 마을 분에게 간단히 말을 건네는 정도는 괜찮은 분위기이다.
가끔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는 외국인들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부산의 속살을 만질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가능한 한 이 마을을 손대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리가 놓이는 순간 섬마을의 내향적 정서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매축지마을을 아파트로 재개발하자거나 물만골을 관통하는 도로를 개설하자는 등의
밀어붙이기식 개발 논리로 우리의 속살을 베어내지 말자.
# 매축지마을
▶찾아가는 길 : 지하철 1호선 좌천역 4번출구, 도보로 5~10분 거리 ▶문의 : 매축지문화원
# 물만골
▶찾아가는 길 : 지하철 3호선 물만골역 1번출구, 도보로 15~20분 거리 ▶문의 : 마을회관
동명대학교 실내건축학과 교수 yein1@tu.ac.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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