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한국전쟁 임시수도...
쫓겨온 수도, 장기독재의 터가 되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집권을 8년 연장한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과 자신을 동일한 국난극복의 위인으로 만들려는 이미지 작업을 벌였다. 사진은 그해 봄 진해에서 열린 이충무공 동상 제막식에 모인 인파.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제공 |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과 부산의 장소를 접목한
'역설의 공간Ⅱ'를 8회에 걸쳐 싣습니다.
이 시리즈는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이 원고를 쓰고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이
사진 자료를 제공합니다.
1952년 5월 26일 오전,
경남도청(현 동아대 부민캠퍼스)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을 태운 출근버스가 정문을 들어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무덕전을 코앞에 두고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크레인이 앞에서 끌어보고, 뒤에서 끌어보아도 버스가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기어를 이리 넣었다가 저리 넣었다 하면서 발버둥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자 크레인은 버스 뒷바퀴를 매단 채 사라졌다.
5시간가량 버스의 동태를 살피던 군중은 사건의 내막은 알지 못한 채 크레인에 끌려가는 버스를 바라보았다.
이 사건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소위 '부산정치파동'의 출발이었다.
■ 대통령 직선 개헌과 이순신 장군
이충무공 동상 제막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제공 |
1952년 이승만정권은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민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위한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수를 차지하던 반이승만 세력 때문에
개헌안은 143대 9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창피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장기집권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중석불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에는 달러가 귀했다.
정부가 보유한 달러를 무역상에게 불하하면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
그리고 임진왜란 360주년을 기념해 이순신과 이승만을 동일한
국난극복의 위인으로 만들려는 이미지화 작업을 시작했다.
진해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은 그 출발이었다.
백골단, 땃벌떼라 불리던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이승만을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을 성토하게 했다.
시나리오의 정점은 국회 출근버스가 크레인에 끌려가던 그날, 5월 26일 0시 계엄령 선포였다.
국회의원 검거령에 시끄러운 새벽이었으나 그날 신문에는 "후방 잔비 조속 소탕이 목적"이라는
국방장관의 계엄령 담화문 발표만이 간단히 실렸다.
국회의원이 공비였던 셈이다.
이렇게 시작된 정치파동은 이승만을 8년 더 권좌에 앉아 있도록 만들었다.
■ 임시수도의 두 얼굴
임시수도 피란국회.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제공 |
임시수도 부산에는 부모와 고향을 등지고 피란 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대통령이 살고 있는 임시수도 부산이 가장 안전한 곳인 줄 믿었다.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많은 피란민은 부산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 지역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부산의 기반시설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혹시 이북에서 내려오는
피란민들 가운데 불순 세력이 섞여있을지 모른다는
이승만의 불안 때문이었다.
재수가 좋아 부산으로 들어왔다 해도 거제리에 있던 피란민 수용소에서
사상검증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노동당원으로 확인되면 곧바로 포로수용소에 감금됐다.
그만큼 발을 들여놓기가 힘들였다.
설령 임시수도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이 사람들에게는 국회 통근버스가 끌려가든, 국회의원들이 도망을 치든,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하든 다 남의 일이었다.
전쟁 당시 정치인들에게 임시수도 부산은 포화 속의 전선 못지않은 싸움터였다.
피란민이 안전한 곳으로 알고 찾아온 임시수도는 추위와 굶주림의 천국이었다.
최후방 임시수도가 아니라 목숨 줄이 왔다갔다 하는 임시수도였다.
■ 임시수도기념관을 다시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부산은 한국전쟁과 복구 덕분에 우리나라 최대의 수출중심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 신군부가 등장하자 부산 경제의 자존심이었던 기업들이 정치적 희생을 당했다.
경제적 중심에서 멀어지는 허탈감을 채워줄 뭔가가 필요했다.
임시수도의 환생이었다.
1984년 부산시는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 관사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했다.
60년가량 경상남도 도지사관사였던 기억은 깡그리 없앤 채 오직 '임시수도'만을 전시했다.
당시 언론의 기사 한 토막을 인용해 본다.
"부산시는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민족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고 수도 탈환과 북진 통일을 염원하던
당시의 생생한 역사적 유물, 기록, 관련기사, 사진, 화보 등을 전시, 반공 교육장으로 삼기로 했다."
1984년 부산시가 재현하고 싶었던 임시수도는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소박한 생활이었지,
부산에서 얻었던 장기독재의 기반이나 당시 내팽개쳤던 국민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후 임시수도기념관은 일시적이나마 이 나라의 중심이었던 수도, 국난을 극복한 대통령이 거처했던 곳을
선전하는 공간이 됐다.
기념관 주변은 '대한민국임시수도기념거리'로 명명됐다.
부산시는 이곳을 주요 관광코스로 만들었다.
절정은 황금색으로 치장된 이승만 대통령 동상의 등장이었다.
심지어 기념관 명칭을 '이승만기념관'으로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곳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고, 부산이 잠시나마 한국의 중심이었음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기념관을 설명하는 안내원도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연애담으로 관광객의 관심을 끌었다.
2011년 6월 어느 날 아침, 임시수도기념관 앞에 설치된 이승만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뿌려졌다.
경찰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페인트 판매상들까지 탐문했으나 완전범죄로 끝났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가 북진 통일을 고집하던 대통령만이 아니라 장기 독재정권을 갈망하던
정치인과 국가로부터 뒷전으로 몰려난 백성의 삶이 함께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한국사 최대 암흑기에 피어난 부산 문화
■ 이중섭 거리와 임시수도
부산 범내골 옛 보림극장 뒷골목에 이북 피란민이 60년 전 문을 연 할매돼지국밥이 있다.
돼지국밥의 맛이나 산동네로 향하는 골목길 분위기가 한국전쟁 피란민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몇 발자국 올라서면 올 봄에 완성된 '이중섭 거리'에 들어서게 된다.
성북고개로 향하는 긴 골목에는 이중섭의 일대기와 작품, 부인에게 보낸 편지 등이 연출돼 있다.
이중섭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부산만이 아니다.
서귀포, 통영, 대구 등 당시 이중섭이 살았던 곳은 비슷하다.
임시수도 부산은 전시임에도 문화의 르네상스시대였다.
전국구 문화인들이 모였다.
특히 화가들은 수시로 전시회를 열어 부산을 문화도시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자 임시수도의 고달픔을 잊고 싶은 화가들은 그들의 수도로 되돌아갔다.
이들을 따르는 부산 화가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산을 지키고 부산을 그리면서 평생을 부산 사람으로 살았던 화가도 많다.
부두 노동자로 고생한 이중섭은 가족과 헤어져 고독한 삶을 살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
엄청난 환영을 받고 있다.
평생 부산을 그린 부산 화가는 박물관 수장고에서나 만날 수 있다.
이중섭 거리를 생각할 때 임호의 거리, 양달석의 거리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차철욱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교수
공동기획: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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