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우리의 갈대숲을 먼저 침범한 건 무례한 인간이다
"숲 곳곳에 둘러쳐진 울타리 때문에 높이뛰기 선수가 됐다…
밝은 차량 불빛에 순간적으로 눈 먼 친구들은 속절없이 죽어간다"
길고 힘든 겨울을 보낸 고라니 가족이 불빛에 깜짝 놀라 쳐다보고 있다. |
겨울 철새의 보고로만 널리 알려진 창원 주남저수지.
하지만 이곳 주남지에는 철새뿐 아니라 모든 야생 동물이 살아 숨 쉰다.
대표적인 녀석이 고라니다.
야행성인 고라니는 낮에는 갈대숲이나 야산에서 쉬다 밤이 되면 나와 먹이활동을 한다.
지난달 31일 밤 주남저수지.
둑길 옆 갈대숲 옆으로 수풀이 펼쳐져 있었다.
과연 이 수풀에서 취재팀이 찾던 고라니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운 좋게도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수풀 한쪽 텃밭에는 고라니 똥·발자국
그리고 너구리 발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말랑말랑한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아마 어제쯤 배설한 것으로 보인다.
허탕을 치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증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이곳 주남지 갈대숲에는 적지 않은 고라니들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먹이를 찾고 있는 고라니 두 마리. |
얼마 지나지 않아 갈대숲 안 채소밭에 고라니 한 마리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됐다.
채소밭 주변에는 어른 키만큼 높은 그물망 울타리가 설치돼 있는데
고라니는 도대체 어떻게 채소밭으로 들어간 것일까.
구멍을 뚫은 것도 아닌데 그물망 밑으로 기어들어간 것일까.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식사 중이던 고라니가 일순간 인기척을 감지하고 부동자세로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동물인지 혹은 동료인지 나름 인지하는 중일 게다.
인간이라고 판단한 듯 고라니는 울타리 쪽으로 달려가더니
마치 높이뛰기 선수처럼 정확한 스텝으로 그물망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은 후 유유히 사라졌다.
고라니가 도망친 것은 인간이 가꾸어 놓은 채소밭을 허락 없이 침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도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으면 녀석도 달아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고라니가 죄인인가.
인간이 멋대로 선을 긋고 자기네 땅이라고 종이 쪽지에 적어놓고 울타리를 설치해 영역을
주장하지만 않았더라면 고라니야말로 원래부터 숲 속에 살았으니 원주민이 아니겠는가.
고라니 처지에서 보면 인간은 어이없고 무례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고라니 한 마리가 한가롭게 뛰어놀고 있다. |
고라니는 뒤쪽 넓적다리뼈가 발달해 달리기도 잘하지만, 높이뛰기 또한
달인이다.
고라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농민은 어른 키 높이 정도의 울타리는
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게 결정적인 오산이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손자병법의 경구가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으리라.
울타리 바깥에 고라니가 좋아할 만한 채소가 어디에도 없으니
고라니가 높이뛰기 선수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울타리 바깥에 열에 하나쯤은 야생돌물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삼이사들은 사슴 하면 누구나 동화책에 등장하는 예쁜 꽃사슴을 떠올린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슴류는 고라니다.
이 녀석은 다른 사슴과 달리 뿔이 없다.
수컷 고라니들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뿔대신 6㎝ 정도의 기다란 송곳니로 결투를 벌이기도 한다.
물을 좋아하는 고라니는 보통 하루에 두 차례 개울을 찾아 물을 마시며 수영을 즐긴다.
녀석이 위급함을 느낄 땐 호수나 강으로 헤엄쳐 도망간다.
고라니의 학명 'Hydropotes inermis'에서 라틴어로 물을 의미하는 'Hydro'가 붙은 것도,
영어 이름이 뜻밖에도 'water deer'인 것도 모두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번식을 위해 이동한 고라니 한 쌍이 짝짓기 중이다. |
몸길이는 90㎝, 꼬리 길이 4~12㎝ 몸무게 9~12㎏으로
노루나 사슴에 비해 작은 편이다.
특히 노루를 많이 닮았기 때문에 옛부터 녹작노루, 복노루, 약노루,
복작이라 불렸다.
고라니는 한국과 중국 북동부에만 서식하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물이다. 최근 개체 수가 현저히 줄어든 중국에서도 고라니는 멸종위기종이 되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고라니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우리 조상들과 대대로 함께 살아온 토착 동물 고라니는 우리 산하의 숲 뿐 아니라
작은 야산의 언덕과 드넓은 들판까지 널리 분포한다.
가까이 있으면 소중한 걸 모른다.
주남지 주변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라니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것도 이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주남지 주변 드라이브 도로에 로드킬 당한 고라니가 자주 방치돼 있다.
자동차에 치여 사망하는 야생동물이 전국적으로 한 해 5,000마리 이상이다.
이 중 로드킬로 가장 많이 희생되는 야생동물이 바로 고라니다.
아마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라니가 로드킬을 당하는 이유는 차량의 밝은 불빛에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달려와도 멍하니 서 있을 뿐 빨리 피하지 못해 사고를 당한다.
이 자리를 빌려 부탁하고 싶다.
주남지 일대를 통과할 땐 언제 뛰어들지 모르는 야생동물을 배려하는 감속운전과 방어운전을 해달라고.
그래야만 야생동물 뿐 아니라 운전자 모두 불행한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숲을 파괴해 만들어진 도로에서 사면초가에 놓인 고라니를 배려해 주는 건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숲의 주인은 모든 생물이기에 곁에 있을 때 보호해줘야 하지 않을까.
고라니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기나긴 세월을 기억하며 우리의 후손도 고라니를 보며 함께 살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린다.
취재 협조= 전시진 환경운동연합 고문·김동규 조류전문가·도연스님 생태전문가·
박용수 생태전문가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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