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리아'를 기억하다
일제점령·미군주둔 '남의 땅 100년'…이젠 우리 품에 안긴 생명의 땅
부산시민공원 전경.일제의 점령과 해방 후 미군의 주둔으로 남의 땅 취급을 받다가 마침내 100년 만에 부산시민공원으로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
- 일제시대 경마장으로 이용하다
- 병참경비대·포로수용소 등 활용
- 해방되자 미군이 새 주인으로
- '한국 속의 작은 미국' 만들어가
- 먹을 것과 물자가 귀하던 시절
- 모든 게 풍족했던 동경의 공간
- 집장촌·양공주 아픔의 역사도
-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재탄생
- 과거 현재 미래가 흐르며 공존
원래는 우리 땅, 그러나 100여년을 남의 땅, 빼앗긴 땅이어야 했던 곳, 하야리아 부대.
원래 인디언 말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을 지녔던 말이, 우리가 빼앗긴 땅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일본인 경마장으로 시작해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군 병참경비대와 외국인포로수용소, 포로를 감시하던
군속교육대가 들어섰고, 해방 후 한 때 1만 여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미군물자보급기지이기도 했던 곳.
'씨레이션'과 '초코렛'으로 상징되던 동경의 공간이면서, '집창촌'과 '양공주'와 미군에 의한
사건사고로 점철된 장소이기도 했던 곳.
지금은 시민들의 염원을 모아 '빼앗긴 100년'을 향후 100년 동안 가꾸어 나갈 '부산시민공원'이 들어서 있는 곳. '하야리아'의 그 '100년의 기억'들을 모아본다.
■ 농사짓던 땅에 경마장 들어서
1950년대 하야리아 부대 전경. |
원래 하야리아 지역은 전형적인 농지였다.
부산에서는 드물게 넓은 평지를 이루면서
그 사이를 동천과 부전천이 흘러, 농사짓기에 적합한 천혜의 땅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1930년 일본인 재력가들(부산경마구락부)에 의해 3만여 평의 부지에
경마장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원래 1921년부터 매축지에서 시작한 경마사업이 번창하면서
더 넓은 부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주민에 의하면
"경마가 있을 때면 일본인들이 버스나 인력거를 타고서 경마를 보러 올라왔지.
그날은 임시전차도 운행하고, 버스요금도 할인해주고 했어."
그만큼 경마장은 연일 수많은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한다.
중일전쟁 이후 경마장은 일제에 징발된다.
그곳에 일본군 부대와 훈련소가 들어서고, 태평양전쟁 때는 '부산항과 중국대륙을 잇는 철도'의
경비업무와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병참경비대'가 주둔한다.
경마장이 대륙침략의 주요한 전초기지가 된 것.
또 외국인 포로를 수용하는 포로수용소와 이들을 감시하는 포로감시원을 교육시키는 '군속교육대'도 설치되는데, 이때 포로감시원으로 강제징집된 조선청년들은, 경마장을 개조한 교육장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동남아 전쟁터로 파견되기도 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 이들은 전쟁범죄자가 되어 큰 고초를 치른다.
그 숫자만 해도 3000여 명에 이른다.
■ 일본군 떠나자 미군들이 주둔
일제시대 경마장 마권판매소로 이용됐던 부산시민공원 내 역사관 |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 병참경비대 자리에 미군이 주둔한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굉음을 내는 탱크를 앞세우고 들이닥쳤다'고 한다.
이것이 '캠프 하야리아'의 시작이다.
이곳에서 미군은 오랫동안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하야리아 부대는 자급자족의 기반시설이 다 갖추어진 곳이었다.
사령부 건물과 헬기장, 미군 숙소 등 군 기반시설 뿐 아니라, 영화관,
클럽 등 대중문화 시설과 축구장 농구장 볼링장 등 체육시설, 초중고교 등 교육시설과 대형마트까지, 모든 것을 갖춘 '한국 속의 작은 미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대 안 낮은 언덕위에 자리한 장교사택은 외화에서나 볼 수 있는 미국 중류층 주택 수준으로 지어졌다.
단층 주택에 방 3개와 거실, 욕실 등을 갖추고, 주택 앞에는 주차장과 잔디밭이 있는 구조였다.
사병들은 막사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한국여인과 계약결혼을 한 군인들은 부대 밖 마을주민들 집에서
방을 얻어 살았다.
미군 대부분이 젊은 나이였기에, 업무를 마치면 부대 주위나 초량텍사스, 서면 등의 유흥업소들을 전전하며 폭행, 성범죄 등 잦은 사건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미군들은 양복 맞추는 일을 즐겨했다고 한다.
특별한 날마다 부대 앞 양복점에서 몇 벌씩 맞추곤 했는데, 양복 기술이 좋으면서 가격도 싸
많이들 맞춰 입고 멋을 부렸다.
그리고는 잦은 파티를 하며, 그들 방식의 미국식 생활을 한국에서도 이어나간 것이다.
■ 세탁업 '론더리'와 '양키장사'
1960년대 하야리아 부대 정문의 풍경 |
하야리아 부대가 들어서고부터 부대 밖 사람들은 부대사람들과
폭넓은 접촉과 다양한 교류를 통하여 이웃이 된다.
그 대표적인 게 군복세탁.
부대가 들어서고 난 후 일정기간동안 미군들은 그들의 세탁물을
마을 주민들에게 맡겼다.
하여 마을주민들은 일명 '론더리'라는 세탁업에 종사하며, 부대에서 나오는 군복을 세탁해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집 앞에 '론더리'라고 써 붙여 놓으면 미군들이 세탁물을 가져다주는 식이었다.
한 주민은 "미군 세탁물을 연지못이나 인근 동천, 부전천 등에서 빨았는데, 군복 한 벌 세탁하면
당시 쌀 한 되 값인 100원을 받았다"고 했다.
한 번 맡길 때 보통 10벌 정도 됐다고 하니 벌이가 쏠쏠했던 셈이다.
"어떤 군인은 찢어지거나 더러워진 군복을 그냥 주기도 했어요. 그러면 그 군복을 물들여서
이것저것 해 입었는데, 당시에는 '사지'라고해서 아주 귀한 옷으로 대접받았어요."
하야리아 부대를 이야기 하자면, 빠지지 않는 것이 음성적으로 거래되던 미군물품들이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양키장사'라 했는데 이들이 미군과 사는 한국여인들에게
술, 담배, 화장품, 과일, 식료품, 전자제품 등 필요한 부대 물건을 주문한다.
그러면 여인들이 미군에게 물건을 받아 이문을 남기고 파는 것이다.
특히 부대 안 물건은 면세라 가격이 싸고 품질도 좋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였다.
그래도 음성적인 거래라 '양키장사'에 대한 단속은 꾸준하면서도 엄중했다.
벌금을 물리고 구류를 살리기도 했는데, 먹고사는 일이라 쉽게 근절되지는 않았다.
때문에 양키장사와 단속반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일상사였던 시절이었다.
그 외에도 마을사람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양복집이나 기념품점, 술장사, 양공주 장사 등을 하며
미군들과의 관계를 넓혀갔다.
모두들 미군부대에 기대어 한 시절을 이러구러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 얌생이꾼들 '얌생이' 몰러 가다
부산시민공원을 찾은 시민들. |
'얌생이'는 경상도 말로 '염소'다.
'얌생이 몬다'라는 말은 '물건을 훔친다' 라는 뜻의 은어.
하야리아 부대 철조망 사이로 주민들이 키우던 염소가 들어가면,
그 염소를 몰고 나오기 위해 주민들이 부대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부대 내 물건을 슬쩍 훔쳐 나오곤 했는데, 이후 부대 물건을
훔칠 때면 애꿎은 염소를 앞세웠다 해서 생겨난 말이다.
이처럼 염소를 몰고 나오면서 물건을 슬쩍하는 사람들은
'얌생이꾼'이라 불렀는데, 처음에는 부대 안 소소한 물건을 '얌생이' 했으나, 나중에는 미군과 짜고 트럭으로 미군군수물자를 대량 빼내는
'기업형 얌생이꾼'도 설쳤다.
당시 하야리아 부대는 주한미군의 물자보급기지였다.
주한미군이 사용할 물자가 미국에서 공수되면, 하야리아 부대는 이들을 전국의 미군부대로 공급하는 것이다.
때문에 부대 안에는 다양한 물자들이 지천으로 차고 넘쳐났다.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 한국인들에게는 '견물생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특히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크든 작든 '얌생이 짓'을 했다.
가져나오는 방법도 다양했단다.
복대를 차고 나오는 사람, 양말 속에 숨겨 나오는 사람, 자전거 안장 속에 물건을 넣어 나오기도 했다고.
그러면 문밖에 있는 장사꾼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가기도 하고, 부대 주위 가게에 맡겨놓고
현금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인 카튜사들 중 몇몇은 외출할 때 점퍼 속에 오렌지를 몇 개 넣고 나와 유흥비로 사용하기도 했다.
서면의 과일가게에 오렌지를 팔면 15원을 받았는데, 이 돈이면 당시 개봉극장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서민 가족들의 일주일치 반찬값도 딱 이정도였다고 한다.
부대 근처에 살았던 우윤근씨는 "미군 물품은 무엇이든 인기가 좋아 부대 밖으로 가져나오기만 하면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었고, 부대 바깥사람들은 이를 받아 적당한 가격으로 되팔았다"고 회상했다.
"부대 앞에는 부대 노무자들이 자주 가는 술집들이 있었는데, 5시 퇴근 무렵이면 찾아가 한잔씩들 해요. 그리고는 부대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계산을 하는 거예요. 미군 물건을 술과 맞바꿔 먹는 거지요."
■ 유엔탕·짬뽕…미군음식
한국전쟁 당시 국제시장은 '온갖 물건을 퍼질러놓은 난장'이라 하여 '도떼기시장'이라고 했다.
이 도떼기시장에는 난전에 솥 걸어놓고 미군이 먹다 남은 잔반을 한데 모아 죽처럼 뭉글뭉글 끓여서 팔기도 했다. '꿀꿀이죽', '유엔탕'이라는 불리던 이 죽은 노르스름하고 구수한 고깃국 맛이 났다.
간혹 쇠고기도 섞여 있어 당시 피란민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끼니이자 영양식이었다.
미군들은 음식에 대해서는 인심이 후했다.
아이들은 미군들만 보면 '기브 미 캔디', '기브 미 초코렛'을 습관처럼 외치며 손을 벌렸는데,
그들은 언제나 '오케이' 하면서 먹을 것을 건넸다고. 마을여인들이 아이를 업고가면 아이에게 주라고 빵을 주기도 하고, 분유가루를 조금 달라고 하면 흔쾌히 여인에게 나눠 주기도 했단다.
한때는 부대에서 먹고 남은 카레를 담장에 내다 놓고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단다.
걸쭉한 것이 양고기와 채소가 들어갔는데, 난생 처음 먹어 보는 이 음식을
마을사람들은 '짬뽕'이라 부르며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부대음식이 부대 밖에서 유행을 해, 한 시절을 풍미했었던 적도 있었다.
미군음식 레시피로 만든 스테이크 경양식집이나 햄버거 등을 파는 패스트푸드점, 햄과 소시지를 넣고 만든
부대찌개집들이 대박을 치기도 했었다.
이렇듯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들은 많은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다.
비록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그들에게는 귀한 목숨을 연명케 했던 '착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 풍족했던 부대는 선망의 대상
부대 밖 사람들에게 부대 안의 풍족한 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대의 인맥을 통하여 부대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일반인들도 부대 안의 사람들이 보증만 하면 출입이 쉽게 허용되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부대 안은 별천지였다.
화질 좋은 영화도 보고, 입에 살살 녹는 양식과 햄버거도 사먹을 수 있었다.
남자들은 양담배도 싸게 사서 피우기도 했단다.
영화는 원어로 상영됐는데, 소위 '가위질' 되지 않은 '오리지널'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도 즐겨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병클럽에는 한국 아가씨들이 미군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주 출입했는데, 이들은 스스럼없이
미군들과의 데이트를 즐기곤 했고, 그중 많은 수가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미군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것이다.
일반인 출입이 허용되는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부대 밖 마을 주민들이 죄다 들어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축제도 벌어지고, 햄버거와 소시지, 칠면조 바비큐 등도 사먹고,
가수들의 공연을 보면서 신이 났어요. 그 날만큼은 우리에게도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캠프 하야리아. 모든 것이 생소하여 신기하고, 풍요로워 부러웠던 곳.
그러나 빼앗긴 땅이었기에 쓰리고도 마음 아팠던 곳, 이제는 '부산시민공원'으로 온전히 우리 품으로 돌아온 땅. 하여 이곳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면면히 흐르며 공존하고 있다. 늘 기억하고 살피고 가꾸어나갈 일이다.
최원준 시인·동의대 문창과 겸임교수
※ 공동기획: 부산진구,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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