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예술]

[이미지의 모험]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금산금산 2015. 9. 9. 21:25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가상과 현실 사이에 떠도는 '검은 A'

 

 

 

 

 

현실과 달리 투영된 여인 뒤 거울풍경…마네의 수수께끼

 

 

 

 

에두아르 마네의 명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마네가 회저병을 앓고 있던 1882년 그린 작품으로 그는 이듬해 사망했다.

 

 

- 배경은 비쳐진 술집 모습
- 투시법상 각도 안 맞고
- 신사는 존재하지 않아
- 실상·가상의 분열을 표현

- '보이는 자'인 종업원은
- '보는 자'인 여신으로 승화

- 매혹적 표정에 담긴 고독
- 포즈는 검은색 'A자' 형상
- 랭보의 詩에도 등장해

 


살롱전 심사에서 낙선함으로써 인상파의 길을 열었던

마네가 1882년 마지막으로 살롱에 출품했던 그림 속으로 이제 우리는 들어가자.


한 여자가 화면 가운데 서 있다.

불빛 속에 어리는 푸른 그늘처럼, 소란 가운데 문득 서늘한 침묵처럼.

그녀는 19세기 화려한 프랑스 파리, 보들레르가 "이곳은 모든 기상천외의 일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오, 나의 고뇌의 수호신, 사탄이여"('파리의 우울')라고 외친 그곳의 밤 속에, 저 오만하고도 슬픈

 근대의 불빛 아래 서 있는 것이다.

테이블과 2층 선이 만들어내는 가로선을 뚫고 수직으로 솟아오르듯, 그러나 힘겹게 그녀는 서 있다.

그녀의 얼굴을 스쳐 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표정들은 무엇인가?

냉소인가, 비애인가, 아니면 연민인가?

에두아르 마네(1831~1883) 최후의 명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은 이상한 거울상을 통해

한 여자의 모순된 내면세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수수께끼가 거울 속에

원작과 다른 습작마네가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하기 전 그린 습작. 각도가 비틀어져 있지 않고 투시법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네는 회저병을 앓고 있었다.

그 병은 1년 뒤 '빛과 색채의 화가' 마네를 불빛도 색채도 사라진

영원의 세계로 데려가고 만다.

폴리-베르제르는 카페이자 카바레이며 서커스 공연장이었다.

만년에 마네는 자주 이곳 한 구석에서 스케치하곤 했다.

마네는 의식하지 못했을까,

그가 창조한 이미지가 그의 삶이 다한 다음에도 자신을 위반하면서

기이한 모순 속을 떠돌게 될 것을?

아니, 그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진 것이었을까?

배경에 거울을 배치했을 때 말이다.



화면에서 서 있는 여자의 배경은 모두 거울상이다.

눈앞에 있을 실제 술집 광경과 이를 반영하는 거울상 사이에 여자는 서 있다.

화면에는 수많은 인물(거울상)이 보이지만, 실제 그녀는 화면 속에 혼자다.

군상 속의 적막, 여기는 소란의 중심이면서 밑 없는 고요다.

실상과 가상 사이에 혼자 선 그녀는 그 자신이 또한 실상이면서 가상이다.

거울에는 그녀 뒷모습이 나타나는데 투시법상의 각도와 전혀 맞지 않는 위치에 있다.

더구나 그녀와 함께 거울에 나타난 신사는 실제 그녀 앞에 그녀를 반쯤 가리고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사는 거울에만 있고 현실에는 부재한다.

화가의 실수가 아니다.



이 그림을 위한 습작(오른쪽 작은 그림 참조)을 보면 투시법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이건 화가가 우리에게 던진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비틀린 각도와 실체 없는 신사 때문에 그녀의 정면(실상)과 뒷면(가상)은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한다.

가상과 실상이 분열하면서도 공존하는 공간, 그 기이한 공간의 여자를 마네는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의 풍경은 또한 그녀가 술집의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를 보는 위치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녀가 모두에게 보이는 위치에 있을 때 그녀는 어김없이 화려한 극장식 술집의 여급이다.

그리하여 초점을 잃은 눈가에는 나른한 유혹과 쓸쓸한 그늘이 서린다.

그녀의 검은 리본 목걸이와 가슴의 꽃 장식에도 화려하면서도 우울한 파리의 밤이 스멀거린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라.

그 잠깐 사이에도 왠지 쓸쓸한 매혹과 알 수 없는 비애감이 당신의 등을 서늘하게 스쳐 갈 것이다.

그녀는 19세기 화려한 밤의 상품으로 거기 진열돼 있는 것이다.

진열대에 있는 과일과 술병들이 만들어낼 갖가지 색채의 헛된 열정은 불빛이 꺼진 뒤, 이 도시 골목길을

또한 얼마나 스산하게 할 것인가? 

 

 



■ 랭보 시와 만나는 이 그림

'시선은 지배'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이미지의 세계에서도 보는 자는 보이는 자를 지배한다.

그녀가 보이는 존재에서 보는 자로 전환될 때, 문득 그녀는 화면을 지배하면서 여신으로 솟아오른다.

거울에 반영된 술집의 풍경은 그녀의 시선이 포획한 우주이다.

그녀 앞에는 장미 두 송이가 유리잔에 꽂혀 있다.

장미는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쳤던 꽃이었으니, 이제 풍성한 테이블은 여신을 위한 성스러운 제단이며,

그녀 얼굴에 어리는 비애는 유럽의 저무는 밤에 대한 여신의 연민이 된다.

여신은 한 시대를 연민하는 것이다.


보이는 자이면서 보는 자인 그녀는 여급이자 성스러운 여신이다.

그녀가 만들어 내는 이 이중성은 여성을 타락한 이브이면서 동시에 성스러운 마리아로 보았던

중세 이중성의 근대적 버전인 셈이다.

모델의 이름은 실제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여급인 쉬종이다.

그녀의 포즈는 화가에 의해 연출된 것이겠지만, 계획된 연출 속에도 알 수 없는 우연은 스며든다.

그녀의 자세는 두 팔과 검정 드레스의 파인 가슴 선에 의해 우연히(?) 알파벳 A 형상을 이룬다.

우연이란 얼마나 공교로운 것인가.

검은 옷의 A, 그것을 우리는 랭보의 '모음들'이라는 괴이한 시에서 당혹스럽게 만난다.



검은 A, 흰 E, 붉은 I, 초록 U, 푸른 O. 모음들,

 

내 얼마 후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라.

아(A), 지독한 악취 주변을 윙윙거리며

번쩍이는 파리 떼 털들로 뒤덮인 검은 코르셋, 또는 어둠의 만(灣).



여신이 되기 위해 그녀는 우선 타락한 세상 속에서 악취 나는 "검은 A" "검은 코르셋"의 요화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말하지 않던가,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황지우)고.

그리하여 여급과 여신은 아파하는 하나의 몸이 된다.

이브와 마리아는 본래 한 몸인 것이다.


그녀의 배경 전면의 거울상은 그림 전체에 스민 모호한 푸른 얼룩처럼, 그녀를 둘러싼 삶이

모두 허상임을 말하는 것일까?

왼쪽 상단, 초록색 신발을 신은 채 허공에 걸려 있는 두 다리는 지금 서커스가 공연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왠지 허공에 걸린 허상의 삶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 생명력, 무궁한 생명력

인도 신화는 이 세상이 모두 비슈누 신의 꿈이라 한다.

비슈누가 눈을 뜨면 세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거울상들도 그녀의 슬프고도 고단한 눈이 감기면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녀는 지금 화려하고 소란한 근대적 삶, 그 그늘의 어두운 허무를 힘겹게 눈 뜨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브도 아니고 마리아도 아니다.

바로 근대라는 척박한 시대를 견디어 가야했던 '여자'라는 여리고도 모진 생명력이다.

동아시아의 현자 노자(老子)는 이 생명력의 근원을 '골짜기의 신'이라고 했다.

노자는 원초적인 페미니스트이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검은 암컷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골짜기의 신' '검은 암컷'은 여성성이 가진 무궁한 생명력의 은유다.

랭보의 상상계 속에 떠도는 "어둠의 만" 또한 그 검은 암컷이 아닐까.

불멸하는 검은 암컷! 검은 A!

이 '골짜기 신'의 이미지는 남자의 역사를 통해 끊없이 은폐되고 왜곡되면서도, 그러나 끈질기게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