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예술]

[이미지의 모험]심사정 '철괴'- 두 세계를 절름거리는 무애의 꿈

금산금산 2015. 9. 2. 20:16

심사정 '철괴'- 두 세계를 절름거리는 무애의 꿈

 

 

 

 

거지꼴의 신선…더러움과 맑음이 무슨 다름이 있으랴

 

 

 

심사정의 '철괴도(鐵拐圖)' 부분.

 

 

 

 

 

 

 

- 준수한 외모의 신선
- 육신이 불타 버리자
- 남아있던 혼 붙들고
- 죽은 거지 몸 속으로
- 두 세계를 넘어서며
- 새로운 깨달음 얻어

- 역적 자손으로 출생
- 수많은 절망과 굴욕
- 조선의 화가 심사정
- 시대에 울분 토했던
- 자신의 서글픈 처지
- '거지 신선'으로 투영



그는 역적의 자손이었다.

할아버지는 노론 소론의 권력투쟁에서 왕세자였던 연잉군(영조)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역적이 되었다.

그가 유산으로 상속받은 것은 절망과 굴욕과 궁핍이었다.

역적의 자손이 무얼 할 수 있으랴.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염을 할 돈조차 없었지만, 중국 연경에서는

그의 그림을 사고파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최고의 화가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이다.

그의 기이한 그림 한 점, '철괴'를 만나보자.


심사정의 선은 춤을 추듯 일필로 획 그은 문인들의 서법이 아니다.

형상을 위한 고도의 책략과 진동을 품은 회화적 선이다.

그의 선에는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의 흔적도 담겨 있다.

캐릭터의 특성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해 내는 형태 감각이 신선하며 먹을 쓰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그림에는 지팡이에 한 발 얹은 거지가 한 손에 조롱박을 들고 서 있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들창코에 지저분한 구레나룻, 족히 백 년은 곰삭은 듯한 남루한 옷을 걸쳤지만

왠지 범상치 않다.

 이 거지의 이름은 이철괴(李鐵拐·'철괴'는 쇠지팡이다).

단순한 거지가 아니라 거지 신선이다.



 

 

■  '훈남' 신선, 거지 몸속으로

심사정의 '하마선인도(蝦仙人圖 )'.

도교와 신선의 세계는 동아시아 판타지의 보고다.

이 보물창고에 들어서면 '해리포터'도 유치해 보인다.

무수한 캐릭터의 신선이 동아시아 상상계에 출몰했지만,

그중에서도 철괴는 가장 매력적이었다. 



이 중국 거지는 멀리 우리의 산대놀이에도 '눈끔적이'와 '연잎'이라는

등장인물로 슬쩍 자리 잡고 있으며, 연암 박지원도 저잣거리의 철괴춤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있으니 대충 이 거지의 대중성을 알만하지 않은가.


얽힌 전설이 흥미롭다.

이철괴는 본래 인물이 준수한 신선이었다.

어느 날 몸을 두고 혼만 유체이탈하여 신선세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 철괴는 제자에게 7일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을

화장하라 하였다.

6일째 되던 날, 제자는 고향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6일이면 이미 사망한 것으로 생각한 제자는 서둘러 스승의 몸을 화장하고 귀향해버린다.


7일째, 신선이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이 초짜 신선이 얼마나 황당했으랴.

그는 준수한 용모의 젊고 팽팽한 몸을 잃어버린 것이다.



몸을 잃어버린 혼은 떠돌다 들판에서 굶어 죽은 거지를 발견했다.

이제 이 추한 거지의 몸이 그의 몸이 된다.

굶주린 거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한 발을 쓸 수 없음을 금방 알게 되었다.

절름발이 거지의 몸을 용납하는 순간, 그는 신선과 거지의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이철괴 이야기는 비참한 처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심사정 자신에게 쉽게 감정이입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심사정은 또 다른 거지 신선도 그렸다. '하마선인도'를 보라.

붓과 손가락으로 쓱쓱 마구 그려댄 듯한 신선의 모습은 무척 해학적이다.

세상을 조롱하는 것인가? 이 선인의 이름은 유해(劉海)이다.

'유해희섬(劉海戱蟾)'은 유해가 두꺼비와 놀았다는 고사성어다.

그 두꺼비는 유해를 세상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었는데 발이 셋이었다, 마치 외다리 같다.

 

 



■ 원효의 무애춤은 조롱박춤

절름발이 철괴의 상징물은 쇠지팡이다.

신화적 상상계에서는 자주 외다리나 절름발이에게 깊은 의미가 부여되곤 한다.

절름발이나 외다리는 상징적으로 경계에 있는 존재다.

그의 한 발은 이쪽 세계를 딛고 있지만, 다른 한 발은 보이지 않는 저쪽 세계에 걸쳐 있다.

절름발이 모티프는 신데렐라의 잃어버린 신발 한 짝 모티프로 변형되기도 한다.

 달마는 관 속에 신발 한 짝을 남겼고, 고대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는 에트나 화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삶을 불의 신화로 승화시켰는데, 이때 분화구에서 신발 한 짝이 튀어 올랐다 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양 세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샤먼이다.

두꺼비의 보이지 않는 한 다리나 절름발이 철괴의 쇠지팡이 또한 다른 세계를 딛는 다리다.


철괴의 또 다른 지물인 조롱박은 더욱 묘하다.

조롱박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면 그 속에 철괴의 축소형이 실루엣으로 들어있다.

이런 기발한 발상은 동아시아에서 수없이 그려진 철괴 도상 중에서도 유래가 없다.


실루엣은 철괴의 혼인 듯하다.

철괴는 유체이탈의 선수가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의 심사정은 그 혼을 몸의 형상 그대로 축소하여 그려 놓고 있다.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혼을 그리고자 했다면 새처럼 비상하는 신선이거나

이전의 준수했던 용모가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철괴는 밤이 되면 이 조롱박에 들어가 자곤 했다.

그리고 보니 불룩한 배를 드러낸 철괴의 몸이 또한 조롱박 몸체와 닮았다.

조롱박은 무슨 요지경인가?

 조롱박의 이미지 주변에는 오래된 신화가 떠돈다.

인류의 기원을 이루는 남매(복희와 여와)가 조롱박에 들어 있었다는 것들 말이다.

지금도 중국 라후족은 조롱박을 자신들 기원으로 숭배한다.

조롱박은 모든 분별 이전의 시원적 모태를 상징한다.

우리의 위대한 사상가 원효 역시 조롱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아는 이 있을까?


그가 파계 했을 때 일이다.

이인로의 '파한집'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옛날에 원효대성이 백정 노릇하고 술장사하는 시중 잡배 속에 섞이어 지냈다.

한번은 목 굽은 조롱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가무하고 '무애'라 한 일이 있었다."

 

무애(無碍)란 걸림이 없다는 뜻이니 신성/세속, 유(有)/무(無)라는 모든 대립을 넘어서 버린 것이다.

조롱박이 무애의 이미지요, 무애의 악기다.

원효의 무애춤은 곧 조롱박춤이다.

조선 말기, 보월거사가 남긴 선시 한편이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유무(有無)가 아니니

언어도 진리도 아무것도 소용없네.

안개 걷힌 가을물, 저 끝없는 곳에

물결은 잠드는데 배 한 척 가네.

 



■ 불우했던 심사정의 마음도

철괴는 가장 맑은 혼이면서 가장 더러운 몸이다.

그러나 심사정은 '조롱박에서 나오는 영혼'과 '조롱박 같은 몸'을 같은 형상으로 그렸다.

신선의 세계와 걸인의 세계가 서로 걸림이 없으니 어찌 다름이 있으랴.

또한 철괴가 조롱박을 들고 있고, 조롱박 속에 철괴가 있으니, 전체 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 속에 전체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혼돈과학에서 '프랙탈'이라 한다.

프랙탈은 모든 질서의 바탕에 놓여 있다.


심사정의 '철괴'에서 '프랙탈'을 만나다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닐 듯하다.

동아시아 전통 세계관이 본래 그러했다.

화엄(華嚴)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작은 티끌 속에 전 우주가 들어 있다)'이라 하지 않았던가.

천공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떠오른다.

거지 신선의 조롱박, 그 무애의 꿈 언저리에 시대와 불화했던

심사정의 외로운 발자국 한 짝도 찍혀 있었으리라.

그 발자국 가을물 끝으로 배 한 척이 되어 떠가고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