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지'낙신부도'-찢어진 삶을 깁는 물과 버들의 몽상
짝사랑 여인을 잃은 영혼, 神과의 사랑을 꿈꾸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최고 화가 고개지의 작품 '낙신부도'에서 조식과 복비가 만나는 장면이다. 아쉽게도 고개지가 그린 진품은 전하지 않으며 이 그림은 송나라 때 그린 모사본이다. |
- 삼국지 속 조조 아들 조식
- 평소 흠모하던 형수가 죽자
- 여신 복비와 연정 몽상하며
- 아름다운 판타지 詩 남기고
- 당대 최고의 화가 고개지
- 시에 담긴 러브스토리를
- 6m 길이의 회화로 재현
- 그림 속 등장 물과 버들은
- 상처 보듬는 여성성 상징
- 조식과 고개지의 만남
- 동아시아 예술의 큰 행운
아우는 일곱 걸음 걷는 동안 시 한 수를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 가마솥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거늘 / 어찌하여 이리 급히도 삶아대는가?"
저 유명한 조식의 '칠보시'다.
난세의 영웅 조조는 뛰어난 시인이었는데 그 자식들도 문재가 뛰어났다.
그중에서 3남 조식의 재능은 탁월했다.
맏형 조비는 그 아우를 늘 시기했다.
제위에 오르게 되자 형은 아우를 불러 일곱 걸음 걷는 동안 시를 쓰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겁박한다.
목숨을 건 벼랑의 일곱 걸음에 아우가 이 시를 읊자 형은 눈물을 흘리며 아우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 6m에 이르는 두루마리 그림
이 형제 간에는 더 쓰라린 사연이 있다.
견희라는 절세미인이 있었다.
조식은 견희를 사모하였지만, 그녀는 형의 아내 견후가 된다.
얼마 후 견후는 귀비 곽씨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조식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아우가 견후를 사모하는 것을 알고 있던 조비는 아
우에게 조롱하듯 견후가 쓰던 베개를 던져주었다고 한다.
견후의 베개를 안고 돌아오던 길, 낙수가에서 조식은 비감에 젖어 '낙신부(洛神賦)'를 짓는다.
그것은 견후의 베개를 통해 흘러들어간 어느 봄날의 꿈결이었는지 모른다.
현실에서 실패한 사랑은 이제 몽상의 세계로 넘나든다.
'낙신부'에서 조식은 낙수의 여신 복비(宓妃)와 짧고도 애달픈 연정을 꿈꾼다.
초나라 송옥이 '고당부'에서 초회왕과 무산신녀의 하룻밤 사랑을 그린 이후, 신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가장 아름다운 판타지는 단연 '낙신부'이다.
고개지의 촉기가 이 러브스토리를 놓치지 않았다.
고개지는 위진남북조 시대 최고 화가였다.
와관사(瓦棺寺) 창건 때 일이다.
한 젊은이가 백만 전을 시주하겠다 하자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젊은이가 불당 벽에 유마힐(維摩詰)을 그리자 그 그림을 구경하러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의 보시가
백만 전을 넘어 버렸다고 한다.
그가 바로 고개지이다.
고개지는 그림뿐 아니라 시와 문장에도 조예가 깊었다.
고개지와 '낙신부'의 만남은 동아시아 문화사의 행운이었다.
고개지의 '낙신부도'는 '낙신부'의 애틋한 사연을 회화로 탁월하게 실현하였다.
이 그림은 장장 6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두루마리는 움직이는 시점을 통해 공간을 자유롭게 구성하면서, 영화의 디졸브 기법처럼
장면과 장면이 겹치면서 분리되고, 분리되면서 이어지는 서사를 전개한다.
다만 아쉽게도 고개지의 진품은 전하지 않고 우리가 보는 것은 송대의 모사본이다.
그림 속에서, 조식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양팔을 벌려 시종들의 걸음을 중지시킨 채 앞에 나서고 있다.
시종들 시선은 분산된 반면 조식의 시선은 복비에게 집중되어 있다.
조식만이 복비를 본 것이다.
복비는 물결 위에 서서 조식을 돌아보고 있다.
물결을 타고 바람을 품은 그 자태가 실로 경묘하다.
'낙신부'에서는 그녀의 자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길게 펼친 두루마리 위에 그린 '낙신부도'의 끝 부분. |
놀란 기러기처럼 날렵하고 노니는 용과 같아
가을 국화처럼 빛나고 봄날 소나무처럼 무성하여라.
엷은 구름에 쌓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
멀리서 보니 아침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 같고
가까이서 보니 녹색 물결 위로 피어난 연꽃과 같네
화가는 실로 생동감 있게 시를 재현하고 있다.
바람을 한껏 품은 그녀의 의상은 돌아보는 그녀 시선처럼 한 인간 사내를 향해 흐른다.
굽이치는 물결은 눈이 마주치는 이 짧은 한 순간, 저들의 설레는 마음의 파동이다.
이 순간 복비와 조식의 감응은 현실과 몽상, 인간과 신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복비와 조식 사이에서 나는 기러기와 용은 시 구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미지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 흐른다.
기러기와 용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이미지는 현실과 몽상이 뒤섞이는 기이한 시공을 연다.
이러한 시공이 아니라면 복비와 조식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하랴.
■ 화가 열정 집중된 버드나무
이 신화적인 시공은 힘이 지배하는 남성성의 시공이 아니라 연정의 설렘으로 젖는 여성성의 시공간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여성성의 중요한 표지는 물과 버들이다.
'낙신부'에서는 조식과 복비가 처음 조우하는 장면이 이렇게 묘사된다.
"버들 숲에 앉아 흘러가는 낙수의 물을 바라보매 문득 정신이 산란하였다."
현실에서 막 신화의 시공으로 넘어가는 요동의 순간! 물가의 '버들 숲'은 현실과 신화가 충돌하는, 일상의 정신이 산란해지는 요동의 지대인 것이다.
휘늘어진 채 너울거리는 버들가지들은 저 건너 풍경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연다.
조식이 물가 버들 숲에 들어섰을 때, 그는 저 건너 몽환적인 여신 세계의 경계에 들어선다.
그곳은 찢어지고 부서진 곳을 깁고 이어주는 여성성의 입구다.
뭇 시인들에 의해 버들가지가 자주 천을 짜는 모습과 연결되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 한종일 은색 레이스를 짜고 있다."(장만영, '비')
고개지는 이 포인트를 놓치지 않았다.
'낙신부도' 전체에 등장하는 모든 나무는 버섯송이처럼 작게 도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버드나무만은 등장하는 여섯 부분에서 모두 크게 그려졌으며, 잎들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화가의 열정이 집중된 것이다.
아마 고개지도 여기서 조식의 요동을 함께 느낀 것이리라.
낙수의 신 복비는 동북아시아 전체에 널리 퍼져 있던 버드나무 여신의 변형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위나라는 원래 동북아시아와 경계를 접했으며, 동북아시아 상상계를 많이 공유했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패자였던 고구려의 시조모 유화(柳花)는 물과 버들의 여신이다.
만주족 신화에서 창세 여신은 물거품에서 탄생한 '아부카허허'인데 '아부카'는 하늘, '허허'는 여음(女陰)이면서
버드나무를 뜻한다.
하늘의 버드나무 아부카허허는 다른 버전의 유화다.
고려 불화 속 수월관음보살도 정병에 항상 버들가지를 꽂고 있지 않던가.
부드럽게 휘늘어지는 버들은 나무들 가운데 가장 여성적인 곡선과 자태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미는 이 버드나무와 친숙하다.
능청거리는 춤사위, 유장하게 휘도는 조선 아악의 선율, 옷고름이 바람을 타는 조선의 의상을 떠올려보라.
■ 잔혹한 현실과 몽상의 세계
신과 인간의 길은 다르다.
삶은 몽상의 세계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법. 떠나야 한다.
복비와 사랑하고 이별한 이야기는 잔혹한 전쟁과 배신의 시대에 상처받고 찢어진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그러나 물거품처럼 덧없는 한 사내의 아련한 몽상이었으리.
혼란의 춘추전국시대가 동아시아 사상의 모태였다면, 또 다른 혼란의 시절,
위진남북조는 동아시아 예술의 모태였다.
위진남북조 시대 두 예술혼, 조식과 고개지의 만남이 봄날 몽상 속에 실버들처럼 어른거리는 '낙신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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