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각의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 마음을 찾는 붓의 춤
호랑이에 기댄 고승…느껴지는가, 서릿발 같은 禪定의 치열함
10세기께 중국 화가 석각이 그린 '이조조심도'(부분). 고승 혜가가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 깨달음 얻기 위해
- 면벽수행 달마에게 왼팔 잘라주고
- 선종 창시한 혜가
- 평온한 얼굴과 대비되는 옷선의 힘·속도
- 동양회화사 통틀어 가장 강렬한 울림
- 소림사 승려들 한 손만 세운 인사법
- 팔 자른 혜가 기려
늙은 중은 호랑이에 기대어 오수를 즐기고 있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한가한 오후쯤일까.
눈을 지그시 감은 호랑이 역시 살기를 지운 얼굴로 평온한 잠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고요한 오수의 장면과는 달리 중의 어깨부터 흘러내리는 윤곽선의 격렬함은 사뭇 전율이다.
혹시 이 그림에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수호지'의 무송 정도의 잔챙이 호걸을 떠올린다면
한참 잘못 짚었다.
우선 이놈의 호랑이는 무송이 상대한 호랑이보다 1000배는 거칠고 난폭한 놈이다.
그런 사나운 놈을 고요히 잠재워 제압하고 있는 중은 분명 예사 화상이 아니다.
이 화상의 법명은 혜가(慧可), 흔히 그를 '이조(二祖)'라 부른다.
석각(石恪)이 그린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이다.
혜가가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는 가히 무협지의 한 장면이다.
'서역에서 온 파천황적 내가신공을 연성한 절세의 고수가 숭산 어딘가에서 폐관 수련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를 은밀히 떠돌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면 제법 무협지의 모양새이지만, 아무튼 인도에서 온 고승 달마가 숭산의 동굴에서
면벽선정에 들어갔을 때, 소문을 들은 무수한 사람이 고승을 만나러 왔다가 얼굴도 못 본 채 돌아갔다.
면벽 9년째,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강한 살기를 띤 사내가 그 동굴을 찾아왔다.
사내가 달마를 불렀으나 달마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작정한 듯 동굴 앞에 무릎을 꿇고 달마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하루 낮, 하루 밤이 지나고 내리는 눈이 사내의 무릎을 덮었다.
달마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문득 사내가 일어서더니 칼로 자신의 왼팔을 잘라버린다.
새하얀 눈밭에 온통 선홍빛 혈화(血花)가 흩날렸으리라.
그 모진 사내가 바로 혜가이다.
■ 소림사 인사법의 유래는
'이조조심도' 그림의 다른 부분. |
혜가는 잘린 자신의 왼팔을 달마에게 바치며 달마를 불렀다.
그제야 달마는 고개를 돌린다.
"그대 왜 왔는가?"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자 달마가 쓱 손을 내밀며 말한다.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은 혜가의 마음에 대한 해석체계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말문이 턱 막히는 순간이며, 달마와 혜가 사이에
무량수 볼트의 전류가 순식간에 흐른 순간이며, 중국 선종(禪宗)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작자 미상의 선시 한 편! (절정을 노래하는 시에 작자의 이름이 무어 필요하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과연 무엇인가?
일엽편주 맑은 바람, 만리에 파도 이네.
구 년 동안 앉았으나 얻은 것 없어
소림의 허공에는 달만 저리 밝았네.
그래도 우리 세속인 생각에는, 달마는 구 년을 기다려 기어코 혜가를 얻었다.
무협영화에 나오는 소림사 중들의 인사법은 두 손 합장이 아니라 한 손을 세우고 "아미타불" 불호를 외친다.
그것은 유사시 다른 한 손을 출수해서 소림권법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음흉한 품새가 아니다.
한 팔을 잘라버린 위대한 구도자 혜가를 기리고 따른다는 표시이다.
그런데 선종의 시조인 달마를 그린 달마도는 하나의 장르를 이루어 개나 소나 마구 그려댄다.
하지만 이조인 혜가를 그린 그림은 중국회화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석각 정도의 공력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자신의 팔을 잘라버리는
그 지독한 구도자의 정신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석각은 오대(五代)와 북송에 걸친 10세기께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활약한 화가다.
성격이 호방하여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의 권력을 조롱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화폭에 그려지는 인물들의 기괴한 형상이나 과장된 변형은 탁월한 재능에다
오랜 시간 축적한 공력이 아니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놀라운 붓의 힘과 속도와 리듬을 품고 있다.
동양화는 선에서 시작해 선으로 끝난다. 일획의 선에 화가의 공력이 담긴다.
"동양화는 손으로 연출한 춤의 기록"이라고 감탄한 로저 프라이의 말처럼 석각의 붓은 춤춘다.
'이조조심도'의 옷선은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춤추며 흐르는 초서인 광초(狂草)의 필법이다.
그 미친 붓의 춤에 화가의 정신과 대상의 기운과 우주의 생성이 담긴다.
■ 호랑이, 너는 누구인가
'이조조심도' 붓의 춤을 음미해 보자.
이조의 머리와 얼굴 윤곽선이 연한 담묵으로 그려졌다.
때문에 신체와 옷의 윤곽선은 더욱 맹렬한 힘과 속도를 얻는 듯하다.
솔개가 토끼를 낚아채듯, 선사(禪師)가 우리 생각과 생각 사이로 주장자를 내리치듯 우리 감각을 후려친다.
이 선은 동양회화사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진동을 가진 선이다.
자기 팔을 자르는 혜가의 구도정신과 단도직입(單刀直入), 선(禪)의 치열함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이조조심도'는 '이조 혜가가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번개같이 휘몰아치는 필선이 가진 비백(飛白) 효과는 마음이라는 유령과 사투를 반영하는 것일까.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고 달마처럼 손을 내밀고 싶다.
그놈의 마음은 어디 있는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우리 같은 속인이 어찌 알랴.
혜가 같은 선지식도 팔을 하나 바치고야 알았거늘.
다만 석각의 그림에서 마음은 아무래도 그놈, 혜가의 팔 아래 잠든 호랑이로 표현되는 것 같다.
엄청난 에너지로 진동하는 혜가의 윤곽선과는 달리 호랑이를 이루는 수백 가닥의 선은 부드럽고
세밀하게 뉘어져 있다. 조율된 마음인가 보다. 그러나 그놈이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눈에 불을 켜며 살기를 띤 채 포효할 때, 필경 그놈은 무송이 때려잡은 호랑이보다 1000배는 난폭하고 사나운 놈일 것임에 틀림없다.
호랑이 등에 놓인 혜가의 오른 팔은 그 강한 선 때문에 호랑이의 부드러운 선과 대비를 이룬다.
반면 혜가의 왼팔은 아래로 흘러내리다 끝에서는 스르르 형체를 지우며 먹빛마저 사라진
여백이 된다.
그리고 호랑이 얼굴을 둘러싼 여백의 띠와 하나가 된다.
그 여백은 늙은 선사의 잠과 호랑이의 잠을 하나로 이어준다.
혜가는 팔을 잃어버림으로써 마음을 보았다.
마음은 그의 비어버린 팔처럼 본래 텅 빈 것인가.
그 사나움도, 그 탐욕스러움도, 그 헤아릴 수 없는 번민도 본래 텅 빈 울림일 뿐인가.
훗날 선종을 활짝 꽃피우는 육조(六祖) 혜능은 이런 게송을 남긴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
'이조조심도'는 오후의 한가한 낮잠이 아니다.
한 발 삐걱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서릿발 같은 선정(禪定)의 치열함을 그린 것이다.
선기(禪氣)를 제대로 표현하는 선화(禪畵)는 석각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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