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예술]

[이미지의 모험]클림트 '팔라스 아테나'잃어버린 신화를 떠도는 응시

금산금산 2015. 8. 4. 19:52

관능적인 팜므 파탈로 변신한 아테나, 우리를 여신의 시대로 이끌다

 

 

클림트가 그린 '팔라스 아테나'(1898년). 캔버스에 유채. 빈 역사박물관 소장. 그리스 여신 아테나의 가슴팍에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대비를 이룬다.

 

 

 

 

 

시인이자 미학자 이성희 박사가 쓰는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을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서양화 동양화 한국화의 세계를 두루 노닐며, 그 이미지 속에 숨쉬고 있는

의미와 재미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모험에 나섭니다.

독자 여러분께 '그림 인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선사하고자 합니다.


- 가부장적 사회에 균열 일으키려는
- 여성에게 덧씌워진 마녀 혹은 요부 낙인

- 뇌쇄적 눈빛 하나로
- 냉혹한 여신에게 반전 이미지 부여

- 가슴에 새긴 메두사, 여신시대 주술 차용
- 화폭 가득히 채운 물고기·뱀 비늘 문양
- 여신들의 주요 상징


클림트의 아테나는 수상하다.

방사하는 눈부신 황금빛 사이로 어둠을 품은 수상한 빛들이 스멀거린다.

그리하여 도처에 미지의 심연을 열어놓고 있다.

우리는 위험하게도 이 이미지의 심연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그 심연에는 클림트라는 한 화가의 욕망, 욕망 너머 일렁대는 신화의 그림자,

그 신화보다 더 깊은 까마득한 혼돈이 화가의 기획을 위반하고 거스르면서 끊임없이 이미지를 흔들고 있다.


'팔라스 아테나'는 일견 매우 단순한 구도처럼 보인다.

황금투구와 황금갑옷을 입은 여신 아테나의 압도적인 반신상이 화면의 거의 전부다.

황금빛 효과를 위해 실제로 클림트는 금가루를 채색에 사용하였다.

황금의 광채를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을 때쯤 우리는 아테나의 고혹적인 눈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금투구 속에 숨은 그녀의 눈은 정면, 바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눈은 심연을 감춘 늪이다.

이 늪에 빠지기 전에 출몰하는 이미지들을 좀 더 따라가 본다면,

그녀만이 우리를 응시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또 하나의 숨은 여성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아테나의 갑옷에서 발광체처럼 빛나는 황금의 지대, 갑옷의 가슴막이에 새겨진 기이한 얼굴.

그녀의 이름은 메두사이다.

 

 



■ 메두사의 정면 응시는 액막이였다

페르세우스와 메두사를 새긴 기원전 550년께의 도자기.

신화 속에서 아테나와 메두사의 악연은 지독하다.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탐스러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해신 포세이돈이 그녀를 탐하다가 아테나 신전에서

그녀와 정을 통하게 된다.

자신의 신전에서 일어난 신성모독에 분노한 아테나 여신은

여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혀를 날름거리는 뱀이 되고 만다.

누구든 그녀를 보기만 하면 돌이 되어버리는 사악한 괴물,

그것이 우리가 아는 메두사이다.

아테나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어코 페르세우스를 부추겨 메두사의 목을 치고야 만다.



그런데 왜 아테나는 그토록 저주했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붙이고 있는 것일까?

메두사는 실은 에게해 일대에 널리 숭배받던, 아테나보다 내력이 훨씬 깊은 여신이다.

그녀의 연원은 남신 중심의 신화(그리스 신화)보다 더 오래된 여신시대에 닿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원전 5세기 이전의 메두사 도상은 주변의 서사(이야기)와 독립하여 정면을 응시하는 반면,

그 이후 메두사 도상은 서사의 상황에 따른 형상과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정면 응시는 마주 보는 이에게 주술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고대인은 믿었다.

그 주술적 힘에 의해 메두사의 머리는 악령에 대한 액막이 기능을 하였다.

정면 응시가 사라진 것은 메두사가 가진 신성한 힘의 상실이며, 여신시대의 마지막 몰락이다.

진정 메두사의 목은 잘리고 만 것이다.

기원전 5세기는 그리스 고전기의 시작으로서 남신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 시점이다.


아테나는 그 자신이 여성이면서 여성의 힘을 무장해제하고 남성 질서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제적 여신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고대 그리스에서 거의 국민극이었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상연되곤 했다.

그 3부작 가운데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아테나는 치명적인 선언을 한다.

모계 혈통을 전면 부정하고 부계 혈통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선언하였던 것이다.

사실 아테나 자신이 어머니의 모태가 아니라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를 쪼개고 태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아테나에 의한 메두사의 처단은 여신에 의한 여신 파괴의 가장 극적인 드라마다.

 

 



■ 반전, 기이한 반전

 

그러나 클림트의 '팔라스 아테나'는 은밀한 반전이다.

아테나는 자신이 그토록 저주한 메두사의 얼굴을 가슴에, 마치 자신의 내면처럼 붙이고 있다.

아테나의 붉은 머리카락은 잔혹한 추억을 넘어, 제어되지 않는 무의식의 흐름처럼

투구 아래로 흘러내려 메두사의 얼굴 양 옆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아테나의 머리카락이 머리카락을 잃어버렸던 메두사의 머리카락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얼마나 기이한 반전인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아테나와 메두사를 하나로 이어놓고 있다.

메두사의 눈, 그 신성하고 위험한 눈의 정면 응시는 이제 아테나의 것이 된다.

아테나는 혼돈에 잠긴 여신시대의 주술을 불러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테나의 응시에는 클림트가 살았던 세기말의 데카당스, 퇴폐적이고 탐미적이 무드가 스며든다.

그리하여 그 응시, 뇌쇄적인 눈빛은 차라리 고혹적인 유혹이다.

클림트는 황금투구 속에 숨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냉혹한 여신 아테나를 관능적인 '팜므 파탈'(요부)로 변신시킨다.


아테나 오른손의 수정구슬 위에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벌거벗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클림트 연구자들은 그녀를 승리의 여신 니케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미지는 이런 고증과 분석을 가로지르고 넘어서 흘러간다.

매혹적인 여자와 수정구슬의 이미지가 흐르는 대로 따라가 보라.

개암나무 숲이 비밀스런 전언으로 수런거리는 오두막집, 수정구슬 속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운명을 예언하는 여자, 그녀가 집시 점술가이거나 마녀가 아니라면 무엇이랴.

그녀는 아테나의 또 다른 분신이다.


오랜 문명사에서 줄곧 억압되었지만 남성 중심 사회의 틈새를 열고 끊임없이 귀환하려는

여신(여성)의 힘은 유럽 사회에서 마녀나 팜므 파탈이라는 왜곡된 모습으로 형상화되기 일쑤였다.

19세기말은 근대 유럽 문명의 위기에 대한 징후와 예감이 세기말의 암울한 종말론적 분위기와 뒤섞이던 시기다. 이 무렵 자각한 여성들은 가정의 족쇄와 사회의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들이 가부장적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 갈 때 남자들은 마녀의 불길한 추억을 환기한다.

팜므 파탈은 마녀의 근대적 버전이다.



■ 코엘료, 아테나를 불러내다

그림 속 이미지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응시하는 세 명의 여성을 만났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테나 황금빛 광채 뒤에 드리운 어둠을 더듬어보아야 한다.

아테나 왼쪽 어깨 너머의 어스름 속에 또 하나의 눈이 있다.

부엉이의 눈이다.

부엉이는 지혜의 여신을 상징한다.

아테나는 자신이 아버지의 머리에서 태어난 것만 기억하겠지만, 사실 그녀가 잉태된 곳은

지혜의 여신 테미스의 자궁이었다.

이 위대한 지혜의 여신은 아테나를 잉태한 채로 제우스에게 삼켜졌던 것이다.

클림트의 아테나는 혹시 이 기구한 어머니를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무의식과 같은 어스름 속에 명멸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부엉이는 어둠 속에서만 눈뜨는 것을 어찌하랴.

클림트 그림의 특징은 강렬한 장식적 충동이다.

그의 그림은 온통 장식적 문양과 패턴으로 흘러넘친다.

'팔라스 아테나'를 지배하는 장식 패턴은 비늘 문양이다.

아테나의 황금 갑옷과 부엉이 몸, 아테나의 얼굴 뒤에 있는 어떤 몸체(해신 트리톤)는

모두 동일한 패턴의 비늘 문양이다.

물고기와 뱀의 비늘.

아테나가 합체한 메두사의 머리카락이 온통 뱀이었음을 상기하자.

물고기와 뱀은 남신 신화보다 더 먼 옛날, 여신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팔라스 아테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여신시대의 아득한 메아리로 가득하다.

 비늘 문양의 파동으로 우리를 유혹하며 밀려온다.

세계적인 작가 코엘료는 2007년 신의 여성성을 탐구하는 소설을 썼다.

'포르토벨로의 마녀'이다.

그는 서구 문명이 억압한 신의 여성성, 여신의 옛 전통을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소환하고자 하였다.

작가가 그 여인에게 부여한 이름은 공교롭게도 '아테나'였다.



◇ 약력

부산대 철학과 졸업.

1989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시인 등단.

부산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저서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동양명화감상' '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학으로 동아시아를 읽다',

시집 '돌아오지 않는 것에 관하여'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허공 속의 등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