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주거 환경
헛디디고 넘어지고… 노인에게 안전한 집을 허하라
▲ 부산 수영구 망미동 노인복지주택인 '흰돌실버타운'에 사는 노인들이 단지 내 게이트볼장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
강원태 기자 wkang@
김 모(75) 할머니가 남편과 함께 사는 곳은 여느 일반 아파트와 다르다.
흔히 노인복지주택이라고 하지만 일반인들은 '실버주택'이란 말을 사용한다.
노인들이 다양하게 취미활동을 할 수 있게 당구장, 바둑·서예·화실 등이 갖춰져 있고, 이·미용, 식사 등의
각종 서비스는 물론 건강 강좌에 최신영화도 볼 수 있다.
게이트볼 구장에다 목욕탕과 헬스시설도 있다.
주거 공간엔 노인들의 안전·편의를 위한 복도 핸드레일, 엘리베이터 앞 의자, 문턱 제거에서부터
응급상황을 대비한 비상호출 벨도 안방, 거실 등에 설치돼 있다.
단지 내엔 병원도 있다.
간호사들이 아침마다 각 세대를 방문, 건강체크도 해준다.
계단·화장실 손잡이와 같은
집 안팎 안전·편의시설 태부족
특정 계층 선택적 복지 아닌
보편적 복지 문제로 인식해야
우선 살고 있는 집 개조 지원
고령자용 주택 보급 늘려야
부산지역 한 노인복지주택 모습이다.
이런 환경이 대다수 노인에게 제공되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 주거 편의 환경의 현주소
부산 남구 대연 2동 박 모(79) 할머니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자이다.
할머니는 월세 단칸방에서 혼자 산다.
집은 지은 지 수십 년이 돼 낡을 대로 낡았다.
문턱이 너무 높아 마루에 발을 올리기 힘들어 중간에 목욕탕 의자를 놓고 겨우 마루로 올라갈 정도다.
대문 밖은 더하다.
계단은 난간이 없어 위험하다.
지난해 중순께 집 앞 계단을 내려가다 다리를 헛디디는 바람에 며칠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우리 주변엔 박 씨 할머니 집처럼 안전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경우가 많다.
박 씨 할머니처럼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비용 때문에 자력으로 난간을 설치하는 것도 힘들다.
올해 초엔 서구 아미동에 사는 60대 노인이 옥외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고도 있었다.
노인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국가나 지자체가 신경을 써주어야 하지만,
개인 책임 시설로 분류돼 있어 지원은 사실상 힘들다.
부산복지개발원 복지사업부 최훈호 연구원은
"고령자주택 내 안전사고를 유발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개선함으로써 주거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으며
최소한의 주거개선으로 사고 예방과 의료비용 절감을 통해 효율적인 노인 복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노인생활과학연구소 한동희 소장은 "그렇다고 주거 복지가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이나 차상위 계층의 노인과 같은 선택적 복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부산이 고령 사회로 진입했다면, 이젠 지역 전체 노인을 위한 보편적 복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 리모델링 지원 절실
노인복지법을 기준으로 하면, 2014년 말 현재 부산은 양로시설(무료 3, 유료 2), 노인복지주택 (유료 2) 등
모두 7곳의 노인주거복지시설이 있다.
전국 7대 도시 중 노인 인구는 두 번째로 많지만, 노인주거복지시설 수는 서울, 인천, 대전, 부산 순으로
인구수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
특히 노인주거복지시설 1개소당 부담해야 할 노인 인구는 5만 7천여 명으로 전국 7대 도시 중 부산이 가장 높다. 보편적 복지 측면에서 봐도 부산의 노인주거복지시설 공급은 7대 도시 중 가장 열악하다.
이런 상황이기에 한정 없이 주거복지시설에만 목매고 있을 수만 없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현재 사는 집을 노인이 편한 공간(안전 손잡이·미끄럼 방지 타일 설치, 문턱 제거 등)으로 개조해주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집이야말로 노인에게 있어 가장 주된 공간이지만, 노인이 살아온 만큼 집도 늙어있기 때문이다.
인제대 디자인학부 오찬옥 교수는 "노화가 진행되어도 기존의 주거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장벽 없는 건축 설계(barrier free design)',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개념이 적용된 주택리모델링이 정부 차원의 정책이나 지원으로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국가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으며 일부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곳이 있긴 하나 이 역시 미미한 수준이다.
이 복지주택에는 노인들이 당구, 바둑, 서예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갖춰져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
리모델링은 노인이 살던 익숙한 환경에서 계속 살 수 있게 한다는
'지역사회에서의 정주(aging in place)' 개념에도 부합한다.
부산복지개발원 이재정 박사는 "노인을 위한 주거 개조는 현재 사는 곳에서 멀리 이사 가지 않아도 이웃, 친구와 사회적 관계망을 지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 다양한 주거의 제안
국가가 개입해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겠지만, 정부만으로는 노인주거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공공 부문 외에도 민간 부문, 특히 비영리단체와 시민사회단체 등이 파트너로 참여해야
비용도 절감되고 서비스도 향상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경성대 사회복지학과 김수영 교수는 "노인은 대부분 자신에게 익숙한 주거에 사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국가나 공공 기관 등에서는 노인의 생애주기에 맞는 신체적 조건(아픔 단계 등), 심리·사회적 상태, 경제적
여건, 가족 관계 등을 고려, 외국의 경우처럼 다양한 주거 형태를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사는 게 좋을까.
이 복지주택에는 노인들이 당구, 바둑, 서예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갖춰져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
장기적으로는 노인의 경제적 상황과 수요를 고려한 실비 또는 임대방식의 고령자용 주거가
더 많이 보급되어야 한다.
자기 집에 지속해서 머물면서 다른 사람과 집을 공유하는 홈 세어링(home sharing)도 제안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노인에게 적합한 주거조건은 물리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노인들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환경(시설 사회화)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9988 1234(노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로, 아흔아홉 살(99)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하루(1) 이틀(2) 만 앓고 사흘(3) 만에 죽자(4)는 의미)를 소망하는 노인들, 그들에게 주거는 생존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노년기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
정달식·김상훈 기자 dosol@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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