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초량 골목길 사람들] 떠나지 못한 이들과 떠나지 않은 풍경들

금산금산 2016. 1. 23. 21:36

[초량 골목길 사람들] 떠나지 못한 이들과 떠나지 않은 풍경들

 

 

 

▲ 산복도로와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동구 초량동 168계단. 이제는 바깥 세상과 소통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는 골목길.

보통 사람이 모여 사는 초량동 산복도로에는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가파른 계단 밑에는 우물터가 있다.

마을 아낙이 모여서 수다를 떨던 곳이다.

누이는 그 우물에서 퍼 담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부산사람들은 산비탈 골목길에 얽힌 추억이 많다.

6·25 전쟁 때 몰려온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 골목길에서 뛰어놀던 꼬맹이도 이제는 중년이 되었다.

그동안 골목길 사람들도 많은 풍파를 겪었다.

1960~70년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던 시절, 산허리에 버스길이 나면서 집이 헐린 사람들은

맨 먼저 이삿짐을 싸야 했다.

 


늘품이라고는
찾아볼 구석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말한다.
산복도로 골목길은
'인생이 흘러온 곳'이라고.
마음속에 간직할 고향은
여기밖에 없다고.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88올림픽이 화려하게 막을 올리던 시절, 달동네 주민은 또 한차례 된서리를 맞았다.

무허가 불량 주택 정비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외국 사절단에게 고지대 판자촌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정부 방침에 따른 조치였다. 


그런 세월을 겪으면서 산복도로 골목길을 지켜 온 사람들.

어쩌면 떠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산복도로 골목길은 '우리의 인생이 흘러온 곳'이라고.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 고향은 여기밖에 없다고.


늘품이라고는 그다지 찾아볼 구석이 없는 사람들.

시류에 둔감하고 발걸음도 느린 사람이 모여 사는 초량동 산복도로에도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쳐다보기도 싫다며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면서 마을 전망대가 생겼다.

부러웠던 산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는 전망대다.

골목 어귀에는 '그야말로 옛날식 막걸릿집'이 문을 열었다. 


 

김민부 전망대에 차려진 매점

 

 

"가난한 사람이 모여 사는 달동네에 볼 것이 뭐가 있다고…."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앉아 넋두리를 늘어놓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도 까닭 모를 정겨움이 숨어 있다.

한때 가슴을 스쳐 갔던 골목길을 찾아가기 시작한 사람들. 추억은 시간을 꾹꾹 눌러 담는 항아리라고 했던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라고 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바로 이 순간까지 산복도로 골목길을 지켜 온 사람들.

그 모습도 다양하다. 


 

'백수다방'이 들어 있는 이바구공작소.

 

 

골목에 젊은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찾아왔다는 청년들.

이들은 정을 나누는 '소통의 문화'를 심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말한다.

당장에는 수익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속내도 솔직히 털어놓는 풋풋한 젊음이 있는 곳이다.

마을 기업을 만들어 무공해 청국장과 탈모방지 비누를 만들어 팔면서 그 수익금으로 독거노인 김장을 담가 주는 등

봉사 활동 자금으로 활용한다는 70~80대 할머니들.

수십 년 정든 집을 허물어 낸 자리에 들어선 카페를 운영하는 인생 6학년 아주머니와 추억의 도시락집과 막걸리 주막에서 파전을 구워 파는 할머니들. 바로 그들이 골목길의 주인이자 산복도로 르네상스의 주역이 아닐까.

산 아랫마을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 생활이 지겨워서 산동네로 다시 이사 왔다는

예순 살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산복도로 카페.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창가에 걸린 한 시인의 시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


한 지붕 아래/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서 살았었지/아이들 노는 소리 우는 소리/싸우는 소리도…

어느 날부터인가/동네가 텅 비면서/골목길 빈집들이/하나둘 요술을 부리더니/게스트 하우스 카페가 들어섰지

북항교 바라보며/커피 한잔을 마시다 보면/이런 날도 있구나 싶다가도/아이들 울음소리 듣고 싶어라/골목에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 보고 싶어라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