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대피소'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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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고다어학원 '명절대피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비상식량 꾸러미'. 각종 주전부리와 음료수가 들어 있다. |
가게들이 대부분 문 닫은 설날, 서면의 한 어학원이 '명절대피소'를 열어 청춘들을 맞았다.
명절대피소.
말 그대로 명절에 일어나는 괴로운 상황을 모면하려고 모인 청춘들의 방공호다.
"취직 안 할 거니"
"결혼 언제 하니" 같은 친척들의 무심한 질문으로부터,
"누구는 일찍 대기업에 들어가 벌써 대리라더라"하는 비교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에덴동산'이다.
"잔소리 지겨운 분 오세요"
서면 한 어학원 연휴 개방
취준생·직장인으로 북적
대피소라고 해봤자 자습실을 개방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즐겁게 보내는 명절에, 2030 청춘들이 대피라는 명목으로
어학원 자습실로 모이는 것은 기록적인 취업난과 분자화된 개인이 만들어낸 신풍경일 터.
지난 8일 정오가 되기도 전에 대피소엔 젊은 청춘들이 하나둘 모였다.
한 손엔 비상식량 꾸러미를 들고서. 대피소 입구에서는 '피명민'(명절을 피해 온 사람)을 위해
비상식량을 나눠줬다.
비상식량 꾸러미엔 과자, 사이다, 캐러멜 따위가 들어있었다.
이 정도면 한나절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명절을 제대로 피하리라'하는 비장한 마음마저 들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대피소 사람들은 20명으로 늘었다.
공부하는 과목도 다양하다.
토익뿐만 아니라 약학대학 시험인 피트(PEET)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명절에도 공부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듯, 익숙한 동작으로 자리 잡고 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앳된 얼굴의 피명민이 대피소에 들어왔다.
대학 2학년에 올라가는 주 모(21·여) 씨.
교환학생 지원을 위해 토플 공부를 하러 대피소를 찾았다.
주 씨는 "호기심에 묻는다는 걸 알지만,'어떤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주 씨는 "꿈을 이룰 수만 있다면 명절에도 공부하는 데 거부감은 없다"고 덧붙였다.
박재오(34) 씨는 취업준비생이 아닌데도 명절대피소를 찾았다.
"요즘은 직장에 다녀도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어요."
그는 이내 영어 듣기를 위해 이어폰을 꽂았다.
영도에서 온 최윤정(25·여) 씨는 토익 준비 중이다.
지난해 대학 졸업 뒤 수산 회사에 취직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퇴사했다.
원래 꿈이었던 '승무원'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그는 "나이도 많고 스펙도 부족해 가능성이 낮은 걸 알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원서라도 내 볼 것"이라고
야무지게 말했다.
명절을 '피해서' 온 사람들의 공간이라고 하면 고단한 청춘들이 눈칫밥과 등쌀에 못 이겨 떠밀려온
난민촌을 떠올릴 터. 하지만 그들과 한나절 함께한 명절대피소는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길에선
단 한 걸음도 '도피'하지 않는 용기 있는 자들의 공간이었다.
글·사진=이혜미 기자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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