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문화현장]하동 '박경리문학관'에서 보낸 하룻밤
악양 들판 보이는 작가 집필실엔 숲바람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무대
- 최참판댁과 주변 건물 고즈넉
- 농업문화전시관이 문학관 변신
- 원주 토지문화재단 도움 받아
- 작가 유품 41점 옮겨와 전시
- 평사리문학관 전시물도 이전
- 기존 시설은 세미나 공간 활용
방문객들이 지난 17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에는 최근 박경리문학관이 문을 열면서 한층 더 활기가 돌고 있다. |
대학생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기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대학생인 여러분은 10권이 넘는 대하소설을 읽을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말에 담고자 한 뜻이 좀 있다.
유장하고 긴 호흡의 대하소설을 읽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 하나다.
열심히 '입력'해야 하는 시기인 대학 시절을 끝내고 사회에 나오면, 그런 대하소설을 뗄 기회가 매정하게 줄어든다는 체험도 있다.
"사유의 근력, 어휘력, 글솜씨, 성취감, 교양, 문화적 안목. 대하소설이라는 터널을 통과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대체로 이런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사회는 여러분께 이런 덕목을 갖췄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막상 대하소설을 읽을 시간은 좀체 안 줄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이 말이 바로 나 자신을 겨누는 칼끝임을 알게 됐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얼마나 읽었는가" 하는 반문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데,
이 장면에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약점이 내게 있다. '토지'를 아직 읽지 않은 것이다.
국제신문에 칼럼 '책 읽어주는 여자'를 연재하는, 독한 잡식성 독서가인 책 칼럼니스트 박현주 씨와 이 이야기를 했다.
"저, 사실 아직 '토지'를 못 읽었어요."
"음~. 그건 이야기가 안 되는데. 당신, 문학 기자잖아?"
"아니, 아예 안 읽은 건 아니고 시도는 몇 번 했지만 끝을 못 본 거라고요. 1897년 한가위 장면으로 시작하는 첫 대목은 눈에 훤해! 오세영의 '만화 토지'도 좀 봤고. 대학교 때 읽을 기회를 놓쳤더니 사회에 나와서 스무 권짜리를 읽는다는 게 쉽지 않더라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대하소설을 안 본 것도 아니라고. 임꺽정,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태백산맥, 아리랑, 지리산, 산하, 대망, 레 미제라블은 무삭제판으로 봤고. 또…."(말이 길어질수록 비굴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그래도 '토지'는 경우가 좀 다르지."
"…."
■ 여름 휴가철에 찾은 최참판댁
작가 집필실에 딸린 정자에서 본 평사리 숲 풍경. |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을 굽어보는 언덕에 최참판댁이 있다.
작가 박경리(1926~2008)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을 하동군이 고택풍 한옥과 전통가옥으로 2001년 조성한 곳이다.
최참판댁 안에 지난 5월 '박경리문학관'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통영에 박경리추모공원과 박경리기념관이 있고 원주에 박경리문학공원이 있긴 한데, 박경리문학관은 뭐랄까 '박경리'라는 이름과 '문학관'이라는
명사가 정통으로 만난 느낌이 새삼스러워 꽤 관심이 쏠렸다.
최참판댁 앞에는 상가가 있고 그 안에는 문인이 오래 머물며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 집필실'도 갖췄으니,
박경리문학관까지 보태면 뭔가 톱니바퀴가 딱딱 맞아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가만, 전에 갔을 때 최참판댁에서 '평사리문학관'을 본 기억이 나는데…문학관이 두 개인건가? 어떻게 된 거지?"
헷갈릴 때는 가보는 게 최고다.
박경리문학관 하아무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아무 사무국장은 경남 문단에서 활동이 활발한 소설가이다.
"국장님! 박경리문학관이 궁금한데요."
"오이소! 언제든지."
"근데 덜렁 가서 박경리문학관 기사만 쓰는 것도 아쉽고, 여름 휴가철에 최참판댁에서 하룻밤 지내본 체험을 썼으면 좋겠는데요."
"오이소! 마침 작가 집필실에 잠깐 여유가 생겼으니 취재 목적으로 오시면 주무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아무 소설가는 아무한테나 이렇게 친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품은 채
지난 16일 하동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배낭에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스무 권 가운데 1권과 2권이 들어 있었다.
■ 대작가의 숨결 느끼는 곳
박경리문학관 뜰에 서 있는 박경리 선생 동상. 권대훈 작가의 작품이다. |
잊고 살았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을.
작가 집필실은 방문객이 많이 다니는 최참판댁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한옥에 차려놓아 고즈넉했다.
뜰로 나가자, 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내는 나뭇잎 우는 소리가
물소리처럼 청량하게 났다.
그 소리가 아까워 무심코 스마트폰을 꺼내
그 모습과 소리를 영상에 담았다.
미학자가 악양 들판 풍경을 봤다면,
"저게 바로 숭고미일 것"이라 했을 것 같다.
집필실에는 TV가 없다.
나그네 홀로 할 일이라고는 책 읽는 것뿐.
최치수가 김평산이를 불러 강포수를 찾아오라고 시키자 김평산은
쪼르르 귀녀에게 가 쑥덕쑥덕 얘기하는 장면('토지' 제1권 346쪽)쯤에서 새벽 2시가 됐다.
불을 끄자 칠흑 어둠 속에서 풀벌레만 울었다.
'이러니 문인들한테 입주 집필실이 필요하겠구나.…'
이튿날 오전 박경리문학관을 돌아봤다.
문학관은 최참판댁 건물 바로 곁이다.
박경리 선생은 악양 들판에 와보지 않고 '토지'를 썼다지만, 26년에 걸쳐 쓴 '토지'가 바로 여기서 시작하고
여기서 끝난다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문학관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뒤 하아무 사무국장을 만났다.
"박경리문학관이 들어선 한옥 건물은 원래 '하동농업전통문화전시관'이었습니다. 분명히 의미가 있는 시설이었지만, 최참판댁 그리고 문학이라는 정체성을 고려해 문학관으로 전환한 것이죠." 하 국장은 "그 과정에서 윤상기 하동군수의 의욕과 노력도 컸다"고 전했다.
'박경리문학관'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쓰는 것과 원주의 토지문화재단(이사장이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씨다)에서 선생의 유품 41점을 전달받아 상설 전시하는 것이 이 문학관의 큰 특징이다.
이를 위해 토지문화재단의 협력을 얻는 데 하동군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설명이다.
덕분에 최참판댁 위쪽 평사리문학관에 전시했던 '토지' 관련 전시물도 새 문학관으로 옮겼다.
평사리문학관 건물은 100석 규모의 세미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해마다 7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인 이곳은 최참판댁-박경리문학관-대형 세미나동-작가 집필실로 이뤄지는 완결도 높은 문학공간의 면모도 더욱 선명하게 갖출 것으로 보인다.
■ "문학과 벗하는 계기 됐으면"
하 국장에게는 그 말을 안 하는 게 좋을 뻔했다.
인터뷰 도중 "아직 '토지'를 다 읽지 못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 말에 하 국장은 들릴 듯 말 듯 이렇게 반응했다.
"에헤이…!"
그러더니 덧붙였다.
"여기 오시는 방문객 대다수가 드라마 '토지'를 기억하지 대하소설 '토지'는 접하지 않은 분들이다.
그러니 이곳을 찾은 것을 계기로 박경리 선생의 삶을 느끼고, 책도 접해보셨으면 하는 게 우리의 바람이다."
결국 "'토지'는 경우가 좀 다르다"는 설득이고 권유였다.
악양 들판이 푸르렀다.
조봉권 기자 bg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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