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황찬란 네온사인 뒤 문화재가 수두룩… [동래], 어디까지 가봤니?
동래 역사 트레킹...
- 젊은이들 핫플레이스인 ‘명륜1번가’만 가봤다면
- 임진왜란 역사관·동래읍성·송공단·장관청·향교 등
- 구석구석 숨은 역사 유적 찾는 재미에도 빠져보시길
지난 22일 부산 동래읍성 역사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동래성 전투 실경 뮤지컬 공연’을 감상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다.
임진왜란 때 2만 명의 왜구에 대항해 동래읍성의 아낙네와 아이들까지 전투에 나서다
총칼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다.
당시 동래읍성에는 200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민초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존경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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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역사 트레킹 참가자들이 동래부 동헌 정문으로 가기 위해 담장을 따라 걷고 있다. 왼쪽부터 망미루 찬주헌 외대문(독진대아문)이 보인다. 금강공원에 있던 망미루와 외대문은 201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
부산 동래구는 동래읍성과 동래읍성전투의 참상을 잘 보여주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뿐 아니라 동래향교 송공단 동래부동헌 등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평소 동래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문외한에 가깝다면 이번에 제대로 동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떨까.
때마침 부산시가 주최하고 부산속들여다보기 부산속속들이투어를 주관하는 대륙항공여행사가
‘역사 겉핥기’족을 위해 동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동래 역사 트레킹 코스’를 개발했다.
■ 임진왜란, 그 뼈아픈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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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역에 있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에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 역사상 최초로
철도 역사(驛舍) 안에 만들어진 역사(歷史) 전시관이다.
2005년 동래읍성의 해자(성벽 밖 도랑 형태의 방어시설)가 발견됐는데
그 속에는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100여 명의 인골과
다양한 무기류가 있었다.
역사관 정면에는 동래읍성 축소모형이 있고
모형 좌우 기둥에는 글씨가 쓰여 있다.
기둥 왼쪽에는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4월 14일 오후 선발대를 보내 동래읍성 남문 앞에 던진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비켜달라’는 나무 푯말 글이,
기둥 오른쪽에는 송상현 부사가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는 답글이다.
송 부사의 기개가 잘 드러난다.
역사관 내부로 들어가면 동래읍성 해자 모형, 동래읍성 해자 출토 유물 등이 전시돼 있고
영상관에서는 ‘동래읍성 전투의 진실은’이라는 7분가량의 영상이 재생된다.
동래읍성으로 올라가면 북문 옆 동래읍성 역사관에 동래읍성의 역사, 출토물 등이 보존돼 있고
마당에서는 투호 제기차기 윷놀이 등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진 성인 줄 알았는데 동래읍성은 1021년 현 부산병무청이 있는 망미동에 세워졌다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거세지자 1387년께 동래시장 일대로 옮겨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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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시장 옆 송공단. |
다시 동래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송공단이 있다.
송공단은 송상현 부사의 기제사를 올리는 단이다.
참고로 부산진성을 수호했던
첨사 정발 장군을 모시는 단은 정공단이라 부른다.
송공단은 1608년(선조 41)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동래읍성 남문 밖 야산인 농주단에 설치했다가
1742년 김석일 동래부사에 의해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로 옮겨졌다.
송상현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선열을 모시고 있는데
제단은 대상의 신분에 따라 높이와 위치를 달리했다.
송공단의 현판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 놓쳐선 안 될 동래의 유적들
동래 하면 향교를 빼놓을 수 없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으로 현재 부산에는 동래와 기장 등 두 곳에 남아 있다.
동래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에 세워져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탔으며
몇 차례 옮겨 다니다가 1813년(순조 13) 동래부사 홍수만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향교 마당에 들어서면 반화루(攀化樓)라는 누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더위잡을 반’ 자가 쓰였길래 더위를 잡으며 시를 읊은 곳이구나 생각했는데 실상은 좀 달랐다.
반화루라는 이름은 ‘반룡부봉’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출신이 미천했던 하우영 번쾌 등이 유방과 관계를 맺어
마치 용의 비늘과 봉황의 날개를 붙잡고 오르듯 제후에 봉해졌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다소 부정적인 의미여서 향교에 쓰이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에서 붙인 게 아닐까 좋게 생각해본다.
향교 내부에는 명륜당이 있고 그 오른쪽 뒤편에는 대성전이 있다.
동래향교 전·현 정교인 양규명·박민희 선생은 “일반적으로 이 두 건물은 일자형인데
동래향교는 특이하게도 어긋나게 배치돼 있다”면서도 “사료가 없어 깊은 의미는 알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동래부동헌은 부사가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지금까지 부산에 남은 조선시대의 단일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유일한 동헌이다.
동래부는 부사가 재임하던 곳으로 국방 및 대일 외교상 중요해 다른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다고 한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문루였던 망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독진대아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돼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건물이 철거됐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졌다.
2014년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동래부 동헌 외대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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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역과 동래구청 사이에 있는 장관청. |
수안역에서 동래구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장관청은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 장관들의 집무소다.
동래부는 예로부터 왜와 대치하는 국방상의 요충지로서
1655년(효종 6)에 동래부사 정석이 창건했다.
몇 차례 중창에 이어 1706년 동래부사 황일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고 한다.
본 건물 외에 행랑채, 대문이 딸려 있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많이 변형됐다.
동래에 오래 살았던 사람도 장관청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많다 하니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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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북문. 북문 앞 장영실 과학동산 옆에 동래읍성 역사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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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역사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동래성 전투 실경 뮤지컬의 한 장면. |
◇ 주변 볼거리
- 동래읍성 흔적 야문터, 101년 된 대궐갈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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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구청에서 향교로 가는 골목길에서 만난 야문터 비석. |
동래구청 앞 동래삼계탕을 지나 동래향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야문터’라 적힌 비석이 있다.
동래읍성의 성문 중 옹성(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을 부설한 성문터로
일명 암문으로 불린다.
4대 성문을 닫은 후 긴요한 일에만 통행이 허락됐던 곳이라고 한다.
이 어디쯤 성이 있었을 텐데
그림으로 보여주면 이해가 빠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래구청 앞 대궐갈비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로 알려졌다.
1916년에 지어졌으니 101년이 지난 셈이다.
과거 동래부 객사로 쓰이기도 했고 부산 최초 양의원인 창생병원의 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동래은행 사택으로 사용된 적이 있어 지금도 인근 노인들은 ‘은행집’으로 부른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이 집을 사들여 갈비집으로 문을 열 당시에는 사랑채와 직각이 되는 부분에 안채가 있었는데
도로가 생기고 옆집과 땅을 매매해 현재는 사랑채만 남았다고 한다.
글·사진=유정환 기자 defi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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