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땀 한땀 짓는 [신사의 품격]…“힘이 남아있는 한 양복점 문 열 것”
명성양복 '이정기' 대표
- 50년째 양복장이로 명물 지켜
- 기성복 시대로 손님 뜸해지자
- 생계 위해 바지선 일도 하지만
- 전통 지키고 싶은 의무감 여전
영도구 봉래동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있는 ‘명성양복’은 5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킨 지역 명물 가게다.
지난 22일 이곳에서 만난 이정기(66) 대표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꼿꼿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다.
손수 지어 입었다는 양복에는 반백년 세월 갈고 닦은 장인의 솜씨가 깃들어 있었다.
명성양복 이정기 대표. 서정빈 기자 |
경북 상주 출신인 이 대표는
1968년 부산에 와 올해로 꼭 50년째 양복점을 가꿨다.
이 대표는 “16살 때 고향 양복점에
‘시다’(보조원)로 들어가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4년 만에 기술을 모두 배워 곧장 영도로 왔다.
당시에도 이미 명성양복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이 골목을 지키고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 양복장이 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성실함과 손재주가 빼어난 그는
전임 대표의 신임을 얻어 1982년 명성양복을 인수했다.
이 대표는 “그때까지도 양복 짓는 것은
최고의 기술로 쳐줬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엔 정장을 입고 출근해야 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단골은 줄을 이었다. 봄 가을 몰려드는 결혼식 손님은 춘추복과 코트 등 한꺼번에 7, 8벌씩을 주문해 새벽 2시까지도 불을 밝히고 양복을
재단하는 날이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명성양복점은 지역 명물일 뿐 아니라
아내와 두 아들을 포함한 이 대표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명성양복도 수제 양복이 기성복으로 대체되는 세태를 피해가진 못했다.
이 대표는 “20년 전부터는 수제 양복을 찾는 이들이 뜸해졌고, 2000년도 들면서는 손님이 눈에 띌 만큼 줄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양복점 이외에 바지선 관련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옷만 가지고는 하루 몇만 원 벌기도 쉽지 않았지만 가족은 건사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여전히 양복점 문을 열어두는 데 대해 이 대표는 “이 업을 놓을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집착보다는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가깝다.
이 대표는 “대통전수방이란 곳을 통해 기회가 닿으면 젊은이들에게 양복 짓는 기술을 물려주고 싶지만
이제 이 기술로 장래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젊은이들의 판단은 존중한다”며 “다만 내 힘이 남아있는 한
명성양복점의 문은 열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주 기자 min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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