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부마항쟁 보고서 2] '기록으로만 남은' 사람들
40년 전 민주주의 외쳤던 그들 … ‘활자’ 깨고 세상으로 나와야
- 1979년 10월 18일 계엄령 선포
- 대학생·시민 평화 집회 벌였지만
- 총칼 앞세운 계엄군에 진압당해
- 부마항쟁은 유신독재 규탄한
- 부산·마산의 보통사람이 주역
- 계엄사 문건 속 외신기자 취재나
- 구술로 일부 항쟁 참여자 등장
- 당시 취재기자 저술 속에도 소개
- 상당수 피해 기록은 확인되지만
- 지금까지 보상 신청 않고 ‘침묵’
- 항쟁 진상규명·명예회복 위해선
-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증언 절실
- 사회도 법으로 보듬고 보상 강화
- 그들이 증언할 분위기 조성 필요
부마민주항쟁 원동력은 평범한 시민에게서 나왔다.
1979년 10월, 철옹성 같던 유신 정권을 규탄하려 시내로 모인 건 ‘보통 사람들’이었다.
부마항쟁 성격을 둘러싼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노동자와 회사원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민중 시위”라는 데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는 드물다.
항쟁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평범한 부산·마산 시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름이 40년 전 군·검·경이나 언론이 남긴 낡은 문서 속에 잠들어 있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시기 부산에서는 공식적으로 1057명이 연행돼 60명이 구속됐다.
526명은 즉결심판을 받았고, 66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마산에서는 506명이 연행돼 60명이 구속되고, 125명이 즉결심판으로 처분됐다.
반면 ‘부마민주항쟁 진상 규명 및 관련자 명예 회복 심의위원회(진상규명위)’에
지금까지 접수된 부마항쟁 관련자 신청은 300건을 간신히 넘는다.
부마항쟁 진상을 규명하고 당시 피해를 보상하려면
기록으로만 남은 항쟁의 주역들이 활자를 깨고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를 ‘아픈 기억’으로만 간직하는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는 게 최우선이라는 의견이 많다.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한 1979년 10월 총을 든 계엄군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부산 시내를 이동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
■ 단편으로만 남은 그날의 이름
1979년 10월 18일 0시 부산에 계엄사령부 포고령이 발표됐다.
포고문에는 각 대학 휴교, 모든 집회·시위 금지, 언론 활동 검열,
영장 없는 체포 등이 이뤄진다고 쓰였다.
부산시청 앞에는 탱크가 배치됐다.
각 대학과 관공서에는 계엄군이 깔렸다.
그러나 항쟁은 계속됐다.
이날 오전 9시35분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 학생들은 휴교에 항의하며
옛 연산동 교정에서 서면교차로까지 침묵 행진을 벌였다.
같은 날 오후 7시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학생 500여 명은 교내 시위를 진행하다 계엄군에 의해 해산됐다.
오후 8시30분에는 시민 700~2000명이 부산시청에 모여들었지만, 총칼을 앞세운 계엄군에 눌려 진압됐다.
당시 부산시가 집계한 시민과 학생 부상자 65명 중 37명은 시청 부근에서 군인들에게 폭행당했다.
당시 계엄사가 작성한 자료에는 지금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피해자 이름이 떠다닌다.
2014년부터 진상규명위가 부마항쟁 관련자들 증언을 수집하고 있지만,
5년가량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은 기록으로만 남았다.
자료에 기재된 피해 사실 또한 매우 제한적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국제신문이 입수한 계엄사 문건에는 당시 ‘오카’라는 이름의 일본인 기자가 계엄사 통제 아래
피해자당 5~7개 질문을 한 것이 문답형으로 정리돼 있다.
계엄사는 부마항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외신 기자들의 요청을 받아 취재를 주선했다.
오카는 피해자 김재룡 씨에게 직업과 다친 경위, 당시 상황 등을 물었다.
이에 김 씨는 “영도구 대광화학 회사원이다. 18일 오전 8시30분 충무동 향원다방에서 곤봉으로 맞았다.
다방에는 종업원과 지배인만 있었고, (계엄사가) 데모를 막고 있을 때다”고 답했다.
오카는 등뼈를 다쳐 고려신경외과(중구 중앙동)에 입원한 부산대 화학과 2학년 박문태 씨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박 씨는 “단지 데모 군중에만 참석하다가 도망치려고 스라브(슬레이브) 지붕으로
올라가다 스라브가 무너져서 다쳤다”고 말했다.
오로지 구술에서만 이름이 드러나는 인물도 있다.
세탁업 종사자 최운수 씨에 따르면 10월 21일 오후 2~3시
제종○ 씨는 중구 광복동 대각사 인근에서 계엄군 트럭에 끌려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제 씨는 부산진구 서면에서 세탁기계기구상을 근거지로 날품을 팔던 세탁 기술자였다.
이날 제 씨는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계엄군이 시위대를 연행할 때 휘말려 같이 트럭에 실렸다.
진상규명위 김선미 위원은 “제 씨 존재는 동료 노동자 최 씨 외에는 말해줄 사람이 없다
. 그마저도 너무 오래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이 같은 사람을 찾아내는 게 숙제다”고 설명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계엄사령부가 시위 참가자를 연행한 후 작성한 문서 중 일부. |
■ 남겨진 이름, 추적도 어려워
10월 17일은 부마항쟁이 본격적인 ‘항쟁’ 색채를 띠기 시작한 날이다.
이날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 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전날 시위에 크게 덴 경찰은 진압을 위해 아침부터 3000명의 인원을 준비했다.
그러나 동아대 학생들의 시위로 불붙은 이날 시위는 서부경찰서 등 일선 경찰서 2곳과 충무파출소 등
파출소 10곳을 부수는 등 모두 17개 공공기관 건물을 파괴했다.
유신 정권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다.
부마항쟁을 취재한 조갑제 기자의 저작 ‘유고’에는
당시 동주여상(현 동주여고) 야간부 2학년 서혜인 씨가 겪은 피해가 짧게 소개돼 있다.
서 씨는 이날 밤 9시40분 중구 대청동 당시 한국은행 인근에서 귀가 중 경찰이 던진
소형 최루탄(일명 사과탄)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
폭발한 최루탄에 정신을 잃은 그녀는 친구들 도움으로 침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서 씨의 코와 눈 귀 이마는 최루탄 파편이 박혀 피투성이가 됐다.
의사는 완치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진단했다.
계엄사 자료에는 17일 밤 9시50분 광복동에서 학교를 다녀오다 최루탄에 맞아 얼굴을 다쳤다고 기록돼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 서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알 길이 없다. 그녀의 이름이 ‘서혜인’이 맞는지조차 불확실하다.
지난해 진상규명위는 동주여고에 1979년 서혜인이란 학생이 재학한 사실이 있는지 문의했다.
그런 이름의 학생은 없었다.
대신 ‘서회인’이란 비슷한 이름의 학생이 있다는 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학적부에 ‘사과탄에 맞아 얼굴을 다쳤다’ 같은 기록은 없었다.
이외에도 ‘유고’에는 계엄군이나 경찰에 맞아 다친 사람 이야기가 다수 실렸다.
17일 오후 8시20분 양복공장 종업원 안승록(당시 21세) 씨는 시위 참여자로 오인돼
부산대학병원 앞 골목에서 경찰관들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체포 과정에서 한 경찰관의 구둣발에 고환을 차였고, 결국 고환 절제 수술까지 받았다.
이후 부산시장과 군 장성이 찾아와 위로금 22만 원을 전하고 사과했다.
이처럼 큰 피해를 입은 본 기록이 있지만, 진상규명위는 지금까지 이들의 관련자 신청을 받지 못했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해 직접 연락하기도 쉽지 않다.
진상규명위 차성환 상임위원은 “기록은 있지만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100여 명에 이른다”며
“이름과 생년월일을 토대로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해도 동명이인이 있으면
개인정보보호법상 자료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 활자 뒤에서 여전히 고통받는 그들
결국, 당사자 직접 증언이 절실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때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또 다른 고통일 수 있다.
최근 진상규명위에 관련자 신청을 낸 A 씨는 오랫동안 계엄사 자료에서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엄사의 ‘불온 언동 유포’라는 문서를 보면 A 씨는 1979년 10월 22일 동구 수정동 한 주민에게
부산의 상황을 말해 달라고 한 뒤 “박 대통령은 독재자다” “중앙정보부는 데모 학생을 잡아 전기 고문을 한다” 등 말을 했다가 유언비어 날조(포고령 위반)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국제신문 취재팀은 A 씨에게 40년 전 받은 피해를 묻었지만,
그는 “부마항쟁 당시 기억이 끔찍해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때문에 당사자들이 터놓고 증언을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아대 홍순권 사학과 교수는 “과거사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보편 현상이다”며
“30일 이상 구금자만 신청할 수 있는 규정을 완화하거나 물질적 보상을 강화해 당시를 증언하는 게
결코 ‘시위 참가자’ 낙인을 들추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심범 임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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