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명태와 정어리' : 남선창고 터에서
초량에 세워진 부산 첫 물류창고… 함경도(옛 명칭 북선) 명태·정어리로 가득차
- 조선 후기 민초 즐겨 먹던 명태
- 함경도 원산 중심 유통 구조가
- 기선 출현 후 부산이 집산지 돼
- 상인들 1900년 ‘북어창고’ 건립
- 1914년 경성-원산간 철도 개통
- 명태영업소 다시 함경도로 복귀
- 남은 창고는 부산 객주들이 매입
- ‘남선창고’라 이름 변경해 운영
- 러일전쟁 이후 함경도는 개발 붐
- 日~만주 뱃길·철도교통망 연결
- 명태·정어리 주축 수산업도 발전
- 홋카이도산도 이때 대량 유입
- 함경도 원산 중심 유통 구조가
- 기선 출현 후 부산이 집산지 돼
- 상인들 1900년 ‘북어창고’ 건립
- 1914년 경성-원산간 철도 개통
- 명태영업소 다시 함경도로 복귀
- 남은 창고는 부산 객주들이 매입
- ‘남선창고’라 이름 변경해 운영
- 러일전쟁 이후 함경도는 개발 붐
- 日~만주 뱃길·철도교통망 연결
- 명태·정어리 주축 수산업도 발전
- 홋카이도산도 이때 대량 유입
다시 붉은 벽 앞에서 섰다.
부산역 맞은편 옛 백제병원 곁의 어느 대형마트 주차장.
온몸 으스러져 사라지고 끝내 잔해로 남아 실존을 강변하던 ‘T-800(터미네이터)의 팔’처럼,
붉은 담장은 화려했던 시절의 마지막 기억을 붙들고 있다.
눈을 감고 손을 뻗어 상상의 문을 두드리면 옅은 비린내가 새어온다.
지난 300년 동안 이 땅 사람들에게 육신을 제공했던 어느 물고기이다.
급변하는 도심 공간 속에서 모진 시간을 버텨낸 저 붉은 담장은 남선창고의 마지막 흔적이다.
남선창고는 1900년 부산 객주 정치국의 주도로 설립된 부산 최초 근대식 물류창고였다.
정치국은 협동기선회사를 만들어 부산을 기점으로, 각각 함북 경성(鏡城)과 인천을 잇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에 따라 함경도에서 수송하는 수산물을 저장할 창고가 필요하게 됐다.
처음에 회흥사, 창흥사로 불렸던 남선창고가 1910년대에는 ‘북어창고(北魚倉庫)’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남선창고에 보관했던 가장 중요한 물류가 명태였음을 알려준다.
함경도의 북어 상인들이 중역으로 참여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여전히 부산 사람 뇌리에 각인돼 있듯이, 남선창고는 ‘명태고방’이었다.
오현명의 가곡이나 강산에의 노래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현명의 가곡이나 강산에의 노래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물고기가 지난 수백 년 우리네 조상을 살찌웠음을 한국인은 안다.
효종 3년(1652) ‘명태(明太)’라는 이름을 처음 드러냈던 이 물고기
18세기부터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물고기가 되었다.
일찍이 서유구는 “관북에서 잡은 명태는 모두 원산으로 실어 옮긴다. 원산은 사방의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다. 배에 실어 동해로 운송하고, 말에 실어 철령을 넘는 것이 밤낮으로 이어져 팔도에 흘러넘친다.
대개 우리나라 팔도에 많이 나는 것으로는 명태와 청어가 으뜸이다”라고 했다.
원산에 모인 명태가 한편으로는 동해를 내려오고, 한편으로는 철령을 넘어 전국에 유통된 것이다.
■ ‘북선’이라는 낯선 이름
남선창고는 원산을 중심으로 했던 조선 후기 유통구조가 근대에는 기선(汽船)의 출현으로 변화했음을 증언한다. 명태는 산지가 명천, 성진, 신포 등이었기에 이곳과 가까운 함흥이
집산지가 되어 부산으로 운송됐다가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부산이 중앙 집산지로 명태 유통 중심지가 된 것이다.
1905년 경부선 개통은 부산의 이런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부산의 객주와 함경도 북어 상인이 근대적 물류창고 ‘명태고방’을 초량에 건립한 배경이다.
부산의 이런 위상은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흔들렸다.
부산의 이런 위상은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흔들렸다.
원산과 서울이 철도로 연결되면서 굳이 부산을 경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원산이 다시 명태의 중앙집산지가 되면서, 1917년 원산에 지점을 설치했다.
그렇지만 얼마지 않아 원산지점이 본점이 되고, 부산본점이 지점이 됐다.
1920년 회사 이름도 ‘북선창고(北鮮倉庫)’로 바꿨다.
명태 유통에서 부산의 중요성이 줄면서 함경도 북어 상인들이 영업소를 원산으로 옮겨가자,
부산 객주들이 북선창고를 매입해 ‘남선창고(南鮮倉庫)’로 이름을 변경했다.
1926년 일이었다.
‘북선’이라는 이름이 낯설 것이다.
‘북선’이라는 이름이 낯설 것이다.
‘북선’은 러일전쟁 이후 만주와 연결되는 한반도 동북부의 전략·경제적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1910년대에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등장했다.
낙후된 지역이었음에도 그곳은 풍부한 자원을 품고 있었다.
철과 석탄 등 광물 그리고 명태로 대표되는 수산물이었다.
1920년대부터 ‘북선’개발은 일대 붐을 일으켰다.
1920년대부터 ‘북선’개발은 일대 붐을 일으켰다.
1914년 원산에서 문천까지 구간이 착공된 이래로,
1928년에는 마침내 함경선(원산―회령) 전 구간이 개통되면서 절정을 이뤘다.
1933년 길회선(길림―회령)이 개통되면서 만주국 수도 신경(장춘)에서 나진까지 철도로 연결됐다.
함경선 개통과 더불어 청진에서 일본의 ‘우라니폰(裏日本)’을 연결하는 직항 항로가 열렸다.
함경선 개통과 더불어 청진에서 일본의 ‘우라니폰(裏日本)’을 연결하는 직항 항로가 열렸다.
나아가 길회선이 개통되면서 만주―북선―우라니폰이 하나의 교통망으로 연결됐다.
그 중심에는 ‘북선 3항(청진, 웅기, 나진)’과 ‘북륙 3항(쓰루가, 후시키, 니카타)’이 있었다.
만주와 연결되는 최단 루트라는 점에서,
1930년대 후반에는 북선 3항이 요동반도의 대련보다 더 중시되기도 했다. 명실공히 ‘환동해시대’의 개막이었다.
■ 출렁였던 남선창고의 운명
‘북선’ 개발은 수산업 발전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것을 추동한 것은 물론 명태어업이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새로운 물고기가 보태졌다.
정어리였다.
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부터 ‘북선’에 정어리 떼가 몰려들었다.
당시 물고기 기름을 이용한 경화유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무수히 몰려드는 정어리가 각광을 받았다.
1930년대 함경북도는 전체 정어리 어획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청진이 ‘정어리의 도시’로 불렸던 것도 이때였다.
‘북선’에 정어리 떼가 몰려들던 때 흥미로운 역전현상이 포착된다.
‘북선’에 정어리 떼가 몰려들던 때 흥미로운 역전현상이 포착된다.
이때부터 명태는 홀연히 격감하여 불어가 계속되었다.
절대적인 수요를 가진 명태의 부족을 어떻게 메웠을까?
놀랍게도 홋카이도에서 명태를 들여왔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전통적으로 명태를 즐겨 잡아왔던 것일까?
아니다.
일본에서는 명태를 ‘스케도우다라’라고 한다.
17세기 후반에 처음 이름을 드러냈지만 맛도 없는 하품으로 여겨져 주의를 끌지 못했다.
일본이 명태에 본격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조선’이었다.
조일통상장정의 체결(1883)로 우리 바다에 진출했던 일본 어민은
관혼상제에서 일상생활에 이르는 명태의 광범위한 수요에 놀라워했다.
일본인의 명태어업을 위한 시도는 청일전쟁부터 있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 러일전쟁 이후 토야마, 니카타 등 호쿠리쿠(北陸)의 어민들이 진출하면서 진전됐다.
일본에서 명태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일본에서 명태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홋카이도에서는 1903년과 1904년에 명태어군이 발견되면서 점차 전업으로 발전해 갔다.
특히 1920년대에는 에도시대부터 성황을 이뤘던 청어가 격감하면서, 그 대체품으로 명태가 주목받았다.
문제는 판로였다.
일본인은 명태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이 거의 유일한 판로였다.
일본 어민들은 조선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명태건조법을 전수받았다.
마침 ‘북선’에서 명태어업이 불황을 이루자, 홋카이도의 명태가 대량으로 원산, 부산, 인천으로 유입됐다.
1930년대 남선창고에 보관된 명태에 북해도(홋카이도)산이 압도적이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 명태 정어리 그리고 우리의 꿈
1940년대에는 ‘북선’에서 정어리가 격감하는 대신 명태가 다시 성황을 이뤘다.
제국주의 일본은 물고기마저 전쟁 도구로 썼다.
화약재료 글리세린을 생산하는 정어리 기름은 국가가 직접 통제했다.
정어리가 사라지자 명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도 명태는 청어와 정어리를 제치고, 일본 제일 어업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도 명태는 청어와 정어리를 제치고, 일본 제일 어업으로 발전했다.
명태어업 급성장 이면에는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명란이라는 근대 ‘맛의 교환’이 있었음은 기억해 둘 일이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벽은 언젠가 허물어질 운명을 타고났다.
저 붉은 벽을 보노라면 더 큰 벽이 떠오른다.
삼십여 년 전 독일 통일을 앞두고 베를린에서 펼쳐졌던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공연이
비무장지대에서도 펼쳐질 날이 있을까?
허허한 남선창고의 터에서 ‘북선’의 꿈을 되살릴 수 있을까?
붉은 벽의 옅은 비린내가 문득 나를 흔들어 깨운다.
김문기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
김문기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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