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화지도'를 그리다] <2> 중구 ②
국제시장에서 군화 팔던 임권택, 40계단서 '가난' 배웠다
▲ 40계단은 역사와 문화를 기억의 주름 속으로 불러들이는 곳이다. 이 계단 중턱에 아코디언 켜는 거리의 악사 동상이 말없이 앉아 있다. |
'영화도시 부산'으로 들어가는 창
40계단은 영화도시 부산으로 입장하는 입구다. 30대에게 이 계단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살인 공간이며, 80대에게는 껌과 담배를 팔던 피난 시절의 기억이 돋을새김된다. 40계단은 중앙동에서 동광동으로 오르는 연결통로다. 연결통로라는 기능에서 벗어나면 역사의 기억과 문화의 미장센으로 펼쳐진다. 계단이 직선도로를 주름지게 했다면 계단의 이미지는 역사와 문화를 기억의 주름 속으로 소환한다. 이때, 장소는 역사와 문화의 전시장으로 다시 태어나고 부산은 역사와 문화의 모자이크화로 완결된다. 부산은 단지 영화제의 도시가 아니라, 이미 영화의 도시였다.
서울 연기자와 일본 자본 결합
90년 전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설립
부산이 한국영화 중심으로 우뚝
두 번째 영화 '운영전' 흥행 실패
윤백남·나운규 상경으로 중심 이동
1·4후퇴 때 영화인 대거 부산으로
유현목·김수용 감독 피란 체험
휴전 후 다시 충무로 시대 개막
영화도시 부산으로 들어가는 창은 문화사의 쪽문이다. 장소와 영화의 기억이 합작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낳는다. 그 앞자리에 임권택 감독이 있다.
임권택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산에 당도했다. 부산에서 이어서 삼일을 더 굶고 부두에서 하역 일을 하게 된다. 그곳은 부산항에 있는 부두였다. 그리고 그는 국제시장에서 군화 파는 일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폭음으로 험한 세월에 맞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동료 군화장수들이 환도하면서 국제시장에 노점상 자리를 얻게 된다. 이 모든 일은 40계단의 인근과 중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년 임권택은 세월이 지나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임권택 영화대학으로 정점을 찍었다. 임권택 영화대학은 상징적이다. 우선 가출 소년이 한국의 대표 감독으로 성장한 한국적 성공 스토리의 클라이막스이다. 임권택은 피난민의 집단 거주지이자 영화관의 산실인 중구에 아픈 기억을 묻어 두고, 부산의 영상클러스터인 해운대 센텀시티의 한 대학으로 귀환했다. 중구에 역사가 있다면 해운대에는 영화 공간이 자리한다. 이 차이가 중구에서 해운대로 부산 영화의 중심 이동이라는 문화의 지형 변화를 적시한다.
첫 번째 이동 :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탈퇴와 윤백남과 나운규의 서울행
90년 전 부산에서 소아과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국제관에서 무대예술연구회의 제2회 시연 공연을 관람했다. 이들은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불온한 자본과 본국의 영화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영화사를 건립하려 했지만 정작 영화제작 인력은 공백이었다. 때맞추어 무대예술연구회는 영주동에서 해산식을 연다. 인력의 수혈이라는 숙제를 해결해야할 일본 자본가와 일본인 왕필렬에게 무대예술연구회 출신 배우는 가뭄의 단비였다. 그들은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로 합류한다.
이렇게 서울의 연기자와 일본의 자본이 결합한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연출가 안종화와 배우 이채전, 이월화, 이경손 등은 영남여관을 임시 숙소로 사용하면서 부산 생활을 시작한다. 이어서 춘사 나운규가 안종화의 손에 이끌려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에 합류하고 영남여관에 여장을 푼다. 영남여관은 한국영화인의 베이스캠프였다. 나운규와 무대예술연구회의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참여는 부산이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영화역사의 장으로 편입되는 순간이다. 이들의 유입과 합류는 서울과 부산을 양분하는 양립체계를 확립하는 순간이며 부산이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두 번째 작품을 앞두고 안종화는 김해 합성학교의 교사이자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윤백남을 섭외한다. 칠판의 판서를 지울 때마다 영화계의 복귀를 꿈꾸던 윤백남은 주저없이 분필을 던지고 메가폰을 선택한다. 윤백남의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합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세력 균형을 의미한다.
두 번째 영화 '운영전'은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운명을 결정한다. 당시 언론의 보도를 인용하면 "만인이 허락하는 단체의 중심인물을 무시하고서 생판 생소한 여자에게 주인공 역을 맡긴" 김우연 캐스팅 사건이 발생한다. 대부분 배우 이월화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었으나 윤백남은 김우연이라는 신인 카드를 꺼냈다. 이는 윤백남의 김우연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일조한 결과이다. 상심한 이월화는 모종의 결단을 내린다. 이월화는 '서울에서 미인이란 월계관을 쓴 모던 걸이오 팔방미인으로 그 명성'을 날리던 여배우였다. 그가 전속회사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지 않은 것은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결국 이월화는 출연 거부와 서울행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다. '운영전'은 흥행 실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감수해야 했다. 이 영화의 실패는 윤백남과 왕필렬로 대표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조선인의 입지를 위축시키고 말았다. 결국 윤백남은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퇴사 카드를 꺼냈고 나운규와 이경손 등 조선영화인들을 이끌고 상경한다. 이때 일어난 부산 영화인의 서울 이동은 한국영화사에서 부산 영화가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이동하는 첫 번째 사건이다.
두 번째 이동 : 휴전협정과 영화인 환도
1950년 한국전쟁은 부산 문화 지형의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1·4 후퇴 후 피난민 유입으로 부산 인구는 47만 명에서 84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주민과 유입민이 반반씩 뒤섞인 셈이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에 이주한 영화인 절반은 영화 제작으로 담배 한 대 피울 짬도 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으며 나머지 절반은 금강 다방과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며 무료한 피난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시의 한국영화 제작은 대구와 진해 그리고 부산으로 삼분되었다. 부산에서는 1·4 후퇴 이후 한형모, 양주남 감독이 이끄는 국방부 정훈국이 보수동 목욕탕에 짐을 풀었다. 공보처는 경남도청 지하실에서 종군기자들이 촬영해 온 필름을 현상하고 편집하여 뉴스릴을 내보냈다. 공보처의 중심인물은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에서 활동했던 안종화 감독이다. 안종화로 대표되는 부산에서 활동했던 인력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유입된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적 우연으로 다시 부산은 한국영화 제작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40계단은 영화도시 부산으로 입장하는 입구다. 30대에게 이 계단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살인 공간이며, 80대에게는 껌과 담배를 팔던 피난 시절의 기억이 돋을새김된다. 40계단은 중앙동에서 동광동으로 오르는 연결통로다. 연결통로라는 기능에서 벗어나면 역사의 기억과 문화의 미장센으로 펼쳐진다. 계단이 직선도로를 주름지게 했다면 계단의 이미지는 역사와 문화를 기억의 주름 속으로 소환한다. 이때, 장소는 역사와 문화의 전시장으로 다시 태어나고 부산은 역사와 문화의 모자이크화로 완결된다. 부산은 단지 영화제의 도시가 아니라, 이미 영화의 도시였다.
서울 연기자와 일본 자본 결합
90년 전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설립
부산이 한국영화 중심으로 우뚝
두 번째 영화 '운영전' 흥행 실패
윤백남·나운규 상경으로 중심 이동
1·4후퇴 때 영화인 대거 부산으로
유현목·김수용 감독 피란 체험
휴전 후 다시 충무로 시대 개막
영화도시 부산으로 들어가는 창은 문화사의 쪽문이다. 장소와 영화의 기억이 합작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낳는다. 그 앞자리에 임권택 감독이 있다.
임권택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산에 당도했다. 부산에서 이어서 삼일을 더 굶고 부두에서 하역 일을 하게 된다. 그곳은 부산항에 있는 부두였다. 그리고 그는 국제시장에서 군화 파는 일로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폭음으로 험한 세월에 맞섰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동료 군화장수들이 환도하면서 국제시장에 노점상 자리를 얻게 된다. 이 모든 일은 40계단의 인근과 중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년 임권택은 세월이 지나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임권택 영화대학으로 정점을 찍었다. 임권택 영화대학은 상징적이다. 우선 가출 소년이 한국의 대표 감독으로 성장한 한국적 성공 스토리의 클라이막스이다. 임권택은 피난민의 집단 거주지이자 영화관의 산실인 중구에 아픈 기억을 묻어 두고, 부산의 영상클러스터인 해운대 센텀시티의 한 대학으로 귀환했다. 중구에 역사가 있다면 해운대에는 영화 공간이 자리한다. 이 차이가 중구에서 해운대로 부산 영화의 중심 이동이라는 문화의 지형 변화를 적시한다.
문관규 교수가 40계단을 조사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
90년 전 부산에서 소아과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국제관에서 무대예술연구회의 제2회 시연 공연을 관람했다. 이들은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불온한 자본과 본국의 영화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영화사를 건립하려 했지만 정작 영화제작 인력은 공백이었다. 때맞추어 무대예술연구회는 영주동에서 해산식을 연다. 인력의 수혈이라는 숙제를 해결해야할 일본 자본가와 일본인 왕필렬에게 무대예술연구회 출신 배우는 가뭄의 단비였다. 그들은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로 합류한다.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있던 자리라고 2009년 부산시가 중구청 아래 샘길에 설치해 둔 표지석. |
두 번째 작품을 앞두고 안종화는 김해 합성학교의 교사이자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윤백남을 섭외한다. 칠판의 판서를 지울 때마다 영화계의 복귀를 꿈꾸던 윤백남은 주저없이 분필을 던지고 메가폰을 선택한다. 윤백남의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합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세력 균형을 의미한다.
한국전쟁 기간 공보처가 지하실에 자리 잡아 종군 기자들이 촬영해 온 영상을 현상하고 편집하는 공간이었던 옛 경남도청사 모습. |
두 번째 이동 : 휴전협정과 영화인 환도
1950년 한국전쟁은 부산 문화 지형의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1·4 후퇴 후 피난민 유입으로 부산 인구는 47만 명에서 84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주민과 유입민이 반반씩 뒤섞인 셈이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에 이주한 영화인 절반은 영화 제작으로 담배 한 대 피울 짬도 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으며 나머지 절반은 금강 다방과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며 무료한 피난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시의 한국영화 제작은 대구와 진해 그리고 부산으로 삼분되었다. 부산에서는 1·4 후퇴 이후 한형모, 양주남 감독이 이끄는 국방부 정훈국이 보수동 목욕탕에 짐을 풀었다. 공보처는 경남도청 지하실에서 종군기자들이 촬영해 온 필름을 현상하고 편집하여 뉴스릴을 내보냈다. 공보처의 중심인물은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에서 활동했던 안종화 감독이다. 안종화로 대표되는 부산에서 활동했던 인력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유입된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적 우연으로 다시 부산은 한국영화 제작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한편 미래의 한국영화 감독들도 피난민 속에 뒤섞여 있었다. 유현목 감독은 영화감독을 준비하던 중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활동사진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라"는 모친의 가르침을 새기며 연출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청년 실업과 전쟁이라는 파고는 피하기 어려웠다. 피난지 부산에서 유 감독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영도다리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영도다리에서 노점상을 하던 모친이 교통순경에게 발길로 차이는 장면이었다. 유 감독은 이 시절 체험한 절망을 '오발탄'에 여과 없이 담아낸다.
김수용 감독도 미군부대 통역장교로 피난지에 있었다. 그는 바닷가에서 전쟁의 고통을 비워 냈다. 그가 찾은 일광해수욕장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텅빈 모래밭에 소년이 앉았고, 마을을 남루한 누더기처럼 모래톱에 젖어"있는 풍경과 대면했다. 이 풍경은 영화 '갯마을'에 담긴다. 부산은 전시 영화 제작의 거점이자 미래의 영화감독들을 단련시키는 영화의 용광로였다.
1953년 휴정협정이 체결되자 서울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는 영주동에서 남산의 한옥 마을(일제강점기, 헌병대 사령부 자리)로 시설과 자재를 옮기고 필동 촬영소로 이름 붙였다. 필동 촬영소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충무로 시대를 견인하는 한 축을 담당한다. 충무로는 촬영소의 이전과 영화인의 유입 그리고 다방과 여관이 자리하면서 한국영화의 중심이 된다. 영화인의 서울 환도와 현상소 이전은 부산에서 서울로 두 번째 영화인 이동이자 충무로 시대를 여는 기폭제였다.
글=문관규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cinemhs@hanmail.net
사진=박종현 사진가 newyorker57@hanmail.net
후원:부산영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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