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5> 기왓장으로 '왜적 친 의녀'

금산금산 2014. 1. 25. 19:47

 

주영택이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 ]<5> 기왓장으로 '왜적 친 의녀'

지붕서 기와 던지며 왜군에 맞선 아낙네

 

 

부산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의 의열각.

 

- 장소: 동래구 수안동
- 임란때 동래성서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숨진 여자 신위 4명, 충렬사 의열각에 모셔져 있고
- 송공단에도 이름 없는 여인들, 순국혼 기린 의녀위 2기 있어


1592년(선조 25년) 부산포 앞바다에 난데없이

100여 척의 왜적 병선단이 까마귀 떼처럼 밀어닥쳤다.

피비린내 나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래 송공단 내의 의녀위 2기.

왜적이 몰려들자 병사들은 물론 수많은 민중들이 창과 칼, 돌멩이와 기왓장 등으로 사력을 다해

왜적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총으로 무장한 엄청난 왜적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부산진성이 무너지고 동래성이

함락되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처절하게 죽어갔다. 그들 중에는 연약한 아낙네가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선열들을 모신 충렬사(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7호·동래구 안락동)에는

여자 신위 네 분을 별사인 의열각(義烈閣)에 모셔 놓았다.

그 가운데 두 분은 습와격적의녀신위(拾瓦擊賊義女神位)로 돼 있다.

기와를 주워 적을 친 의녀의 신위란 뜻이다.


송공단(부산시지정 기념물 제11호·동래구 복천동) 남단에도 왜적에 맞서 싸우다 순국혼이 됐던

두 무명 아낙네의 넋을 기려 세운 '의녀위(義女位)' 2기가 서 있다.

 

이 두 아낙네는 1592년 4월 15일(음력) 시골에서 동래성 안으로 볼일이 있어 왔다.

동래성 안은 왜적이 쳐들어 와서 동래의 병사와 민중들이 함께 왜적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총알과 화살이 날아들고 창끝과 칼날이 번쩍였다.

몽둥이질이 난무했다.

백병전이었다.


시골에서 온 두 아낙네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선조의 피가 흐르고 있는 내 고장 동래만큼은 왜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아낙네들의 결의는 비장했다.


돌팔매질로 항전하는 남정네를 도와 열심히 돌을 날라다 주었다.

그러나 금방 힘이 부쳤다.

급기야는 왜적에게 쫓겨 동헌(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호·동래구 수안동) 기와지붕으로 간신히 기어 올라갔다.

그 아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왜적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은 기왓장을 뜯어내 밀려드는 왜적을 향해 혼신의 힘으로 그 기왓장을 김상(金祥)과 함께 집어 던졌다.


왜적 수십 명이 그 기왓장을 맞고 고꾸라졌다.

그러나 던져도 왜적들은 끝간 데 없이 몰려들었다.

젖 먹은 힘까지 다해 기왓장을 집어 던지던 그 아낙네는 마침내 지붕 위에 털썩 주저앉았고, 바로 그때

왜적의 사정없는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칼을 맞고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눈을 부라린 채 분을 삼키지 못하고 왜적을 향해 침을 뱉고 꺼져가는

목소리로나마 호통을 쳐댔다. 숨이 끊어졌다고는 하나 어찌 차마 눈인들 제대로 감을 수 있었겠는가.


전쟁이 끝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 나섰는데, 아들 김상은 아낙네와 함께 지붕 위에서 죽어 있었다.

그 얼마나 장한 아낙네였던가.

송공단에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자그마한 빗돌 2기지만 그 속내만큼은 길이길이 남아 전해져야 할

우리네 산 역사 이야기가 아닐까.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