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택이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 <2> 장산국의 왕비능
아홉 공주 효심으로 쌓은 엄마의 무덤
부산 기장군 장안사 입구 하근마을에 있는 장산국 왕비능. |
- 장소: 부산 기장군 장안읍 기룡리
- 5세기경 '우시산국' 멸망…왕비와 아홉 공주 농사꾼 생활, 모친 숨지자 마당에 묻고 흩어져
- 자매들 매년 음력3월 무덤서 만나 치마폭에 흙 담아 봉분 쌓아
- 주민들 효심 기려 한마당 축제
해운대에서 울산으로 가는 14호 국도를 타고 오른쪽으로 장안사 입구에 이르다 보면 하근마을이 나온다.
장안초등학교를 지나 기룡천 다리를 건너면 국도변 장안배 집하장 및 판매장 앞에 소나무 숲이 있는
작은 동산에 왕비능이 있다.
먼 옛날 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곳으로, 다섯 무덤 중 입구의 첫 무덤이 왕비능이다.
여기에는 망국으로 인한 왕족의 비극과 왕비능을 아홉 공주가 쌓았다고 하는
아름다운 효행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부족국가시대 말엽인 5세기께 장산에 '우시산국'이라 불린 작은 부족국가인 장산국이 있었으나
신라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왕과 왕자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왕비만 아홉 명의 공주를 데리고 장산에서 북쪽 산속으로 탈출하여
지금의 기룡리 근처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미 신라의 손길이 뻗쳐 왕비와 아홉 공주는 어쩔 수 없이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농사꾼으로 품팔이를 하면서 보리죽으로 겨우 연명했다.
신라의 병사들은 이곳까지 와서 왕비와 공주들을 찾고 있었다.
왕비와 공주들은 넝마옷을 입고 농사꾼 노릇도 했지만, 먹을 것이 없어 걸식을 하면서 움막집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기를 몇 달, 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자들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왕비와 아홉 공주는 날마다 화철령 고개를 넘어가 왕과 왕자들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왕비는 왕과 왕자들에 대한 근심이 쌓이고, 몸에 익지도 않은 농사일에 지쳐 병을 얻어 숨지고 말았다.
아홉 공주는 어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슬피 울 뿐 어쩔 줄을 몰랐다.
놀람과 슬픔에 어찌할 줄 모르던 아홉 공주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마당 한가운데 묻었다.
그리고는 제각기 이웃마을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해마다 철쭉꽃이 붉게 필 무렵인 매년 음력 3월, 달 밝은 보름날이면 아홉 공주가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만난 아홉 공주는 어머니의 무덤이 초라해 자신들의 손으로 무덤을 왕비능 답게 만들기 위해서
만날 때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치마폭에 흙을 담아 봉분을 쌓았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해 온 화전(花煎·꽃에 찹쌀가루를 발라서 기름에 띄워 지진 떡)과 음식을 차려 놓고,
제문(祭文)을 읽고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해마다 이처럼 치마폭에 흙을 담아 쌓은 봉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츰 커져서 마침내 큰 왕비능이 되었다.
그러자 아홉 공주가 살고 있던 아홉 마을의 부녀자들도 해마다 그날이 오면 모두 이곳 무덤가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아름다운 효심을 기리며 한마당 축제를 열었다.
이 아름다운 풍습이 1500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
기장 기룡리 주민들은 왕비능을 '딸 아이 무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날이면 마을 부녀자들이 무덤가에 모여서 아홉 공주의 효행을 기리는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화전놀이로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을 하소연하기도 하고 백일장을 열어 시상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마골 향토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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