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고전에 길을 묻다] <6> '경세'의 이치 ②

금산금산 2014. 2. 26. 15:43

 

경제…[고전에 길을 묻다] <6> '경세'의 이치 ②

자원을 지혜롭게 써 백성을 넉넉게 함은 위정자의 소임이다

자원 부족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함은 명백한 무능이다

 

 

 

 

초 나라 왕을 설득하는 묵적.

 

제자백가 가운데 묵가는 참으로 의문과 신비에 쌓인 집단이다.

묵가는 노 나라 사람 묵적(墨翟, 서기전 468∼서기전 476)이 창시

하였다고 하지만, 정작 묵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묵(墨)'이라는 말이 묵적의 성이 아니라 묵형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설도 있고,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다.

생몰년도도 분명하지 않다.

 

 


전국시대에서 한 나라 초까지만 하더라도 묵가의 세력은

유가와 비교할 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묵가와 유가는 서로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

묵자는 [유가의 지나친 형식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유가가 [음악을 중시한 데 대해서도 역시 비판]하였다.

음악은 음란하고 사치스럽다는 이유에서이다.

무엇보다도 겸애(兼愛)무차별적인 사랑을 주장한 묵자가 보기에, 유가의 인(仁)이란

조건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해 유가를 계승한 맹자와 순자 역시 묵자와 그 제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묵가의 세력에 대한 경계심도 없지 않았겠으나, 맹자가 보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묵자의 주장은

결국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맹자는 묵자의 헌신성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였지만,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과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것은 다르다고 비판하였다.

 

   
묵적(墨翟). 노 나라 사람으로 송 나라를 섬겼다고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신분이 천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학식의 깊이로 보아서는 사대부 출신이었던 싶다. '묵자(墨子)' 71편을 썼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53편이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절장(節葬)·천지(天志)·명귀(明鬼)·비악(非樂)·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순자의 묵자 비판은 좀 더 구체적이다.

겸애, 비공(非攻)과 함께 묵자의 주요한 사상은 절용(節用)이다.

'묵자(墨子)'의 '절용' 편에서는 옛 임금들에 대해  "일용품을 생산할 때는 백성들이 사용할 만큼만 공급하고 더 이상 생산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배고픔을 면할 만큼만 먹고 진귀한 재료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백성들의 이로움에 보탬이 되지 않는 낭비는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순자는 다시 비판하여 말한다.

"묵자는 천하의 재물이 부족한 것을 걱정한다. 그러나 천하의 재물은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충분하다. 재물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는 것은 천하의 공적인 걱정거리가 아니라 묵자의 사적인 걱정거리에 불과하다."


묵자가 걱정하는 것은 부족함 그 자체가 아니라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면 언젠가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오늘날의 생태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덜 소비하면 덜 생산해도 되고, 덜 생산하면 자원의 낭비도 아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순자"쓰임새를 아껴 백성들을 넉넉하게 하면 나라는 자연히 부유해진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아낀다는 것은 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원을 사용하되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생산적 소비'처럼, 자원을 생산적인 곳에 적절히

사용하면 나라도 부유해지고 백성들도 풍요로워질 수 있는데, 부족할 것을 미리 걱정해 무턱대고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경제는 우물물과 같아서 자꾸 퍼내면 가득 차지만 쓰지 않으면 마른다"고 한 말도 같은 이치이다.

우리 정부는 경제가 어렵고 어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버릇이 있다.

가령 한여름에 전력이 부족하다고 상점들을 단속하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 학생들은 그 무더위 속에 어떻게 공부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공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 때문에 국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면,

누구든 간에 책임지는 높은 분이 한 사람은 있어야 옳지 않은가 말이다.


묵가가 그토록 큰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일도 궁금하지만, 묵가의 해체는 더 의아한 일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묵가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묵가의 집단이 왜 어떻게 해체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문헌을 찾아보아도 그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묵가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다만 유가가 중국의 국가이념으로 높여지면서 묵가는 권력의 탄압을 받아 사라지지 않았나 하고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묵가가 다른 집단들에 비해 특별히 권력의 견제와 탄압을 받는 이유는 물론 그 세력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로는 이들이 군사집단이었기 때문이었을 듯 싶기도 하다.

묵가는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 집단생활을 하였는데, 이 집단은 노동공동체인 동시에 전사공동체였다.


이야기한 것처럼 묵가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겸애비공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묵가는 사해동포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이 왜 군사집단을 만들었는가 하고 의아할 수도 있지만, 침략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송 나라를 치려고 하자 묵적은 제자 300명을 이끌고 송 나라를 도우러 나서기도 하였다.

이에 초왕은 송 나라를 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공자의 제자가 70여 명이었다고 하니 300명이면 적지 않은 군사이다.

그런데 이 일에는 또 뒷이야기가 있다.

송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돌아가던 묵자의 일행이 비를 만나 남의 사당에서 비를 피하고자 하였더니, 송 나라 사람들은 매정하게 내좇았다는 것이다.

묵적은 송 나라를 구하였지만, 정작 송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일을 몰랐다는 이야기다.

외국에서는 다들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걱정하는데, 정작 우리는 높은 베개 베고 밤새 편히 자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사마천의 직언에 궁형 내린 한무제, 동중서에게는 귀를 열다

   
젊은 시절의 동중서는 너무 학문에 몰두한 나머지 3년 동안이나 정원에 나가 보지 않아 텃밭이 황폐해지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장막을 치고 그 뒤에 앉아 강의를 했기 때문에 스승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도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허베이성인 광천 사람이라고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유학이 중국의 국학으로 높여진 것은 한 나라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 서기전 170~서기전 120)의 건의에 따라서이다.

무제가 지방에 묻혀 지내는 인재들을 불렀을 때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천거되었으며, 황제가 널리 인재를 구할 방책을 묻자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제시하여 크게 인정받았다고 한다.

유명한 분서갱유에서 볼 수 있듯이 춘추전국 시대를 평정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秦) 나라 시황제는 사변을 앞세운 학자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제자백가 가운데 시황제가 존중한 것은 오로지 법가인데, 법가는

이론보다 현실에서 치세의 방책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분서갱유의 유(儒)가 꼭 유가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정치를

주장하는 유가가 특히 시황제의 탄압을 받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무력으로 백성들을 복종케 하는 억압정치를 펼친 데다가, 만리장성 건설과 같은 부역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원성이 높았다.

   

시황제 사후에 재상 이사(李斯)와 환관 조고(趙高)

정사를 농락하는 등 국가질서의 문란이 극심했다.

마침 이러한 때 동중서가 등장한 것은 시대적 상황의

요구였다고 하겠다.

동중서는 정치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덕치와 왕도를 중시하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하가 아무리 좋은 건의를 해도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리기도 했지만,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널리 장려한 것 역시 한 무제의 공이다. 다만 황제에게 직언하기는 똑같은데, 누구는 궁형을 받고 누구는 스승으로 존경받았으니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래서 제멋대로인 황제보다 민주적인 대통령이 더 좋다는 뜻이다.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