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주의 茶飯事] ② '끽다거 끽다래'

금산금산 2014. 3. 5. 16:28

 

[이근주의 茶飯事] ② '끽다거 끽다래'

잡생각 버리고, 차나 한잔 하러 오시오!

 

 

 

▲ 해인사 지족암 경내에 설치된 일타 스님의 '끽다거래' 돌비. 도림원 제공

차에 얽힌 선승의 이야기는 흔하다.

 

그중 조주선사의 '끽다거'는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쉽게 듣는 말일 테다.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인 조주선사(778∼897)에게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우주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부처가 세상에 나툰(등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주선사는 이에 대해 답 대신 한 마디만 건넸다.

또 다른 제자가 찾아와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도 그는 같은 말을 내뱉었다.

"끽다거".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란 뜻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많다.

그중 하나는 조주선사가 차를 극진히 사랑했고, 그 차를 누구에게나 대접했다는 사실이다.

평생 동안 차와 함께 산 조주선사는 늘 맑고 건강한 모습으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끽다거'는 단순히 차나 한잔 하고 가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차를 마시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가라는 선사의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다.

 

차는 하찮은 음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깨달음의 관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스승은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다!

답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차와 선의 관계를 '다선일여'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란 말이 있다.

한자로 쓰면 '끽다래'(喫茶來)인데, 조주선사의 '끽다거'와 대구가 되겠다.

차를 한 잔 하고 가라가 아니라 차를 한 잔 하러 오라는 뜻이니 더 반갑다.


'끽다래'가 필자의 개인 차실인 도림헌에 걸려 있다.

'끽다래'란 말을 처음 쓴 금당 최규옹 선생이 직접 주신 것인데, 커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의 묵언이다.

금당은 법정스님의 저서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에 나오는 차 할아버지다.

육우와 함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노동(?∼835)의 시 '칠완다가'로

하루를 마감했으면 좋겠다.

'첫째 잔은 입술과 목을 적셔 주고/ 둘째 잔은 외로움과 답답함을 씻어 주네/ 셋째 잔은 마른 창자를 가려주니/

생각나는 글이 오천 권이 되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이 솟아/ 평생 불평스러운 일들이 모공을 통하여 다 사라진다네/ 다섯째 잔은 살과 뼈를 맑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선의 영과 통한다오/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나네.'

한중차문화 연구회장 dorim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