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내 고장 숨은 '이바구'…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이야기 깃든 양산 '산막'

금산금산 2014. 6. 4. 09:09

 

[내 고장 숨은 '이바구'…]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이야기 깃든 양산 '산막'

삽량주 먹여 살린 농어물 산지, 이젠 공단으로 먹여 살린다

 

 

 

 

산막공업지구가 조성되면서 원효대사요석공주, 설총의 애틋한 이야기 속의 '산막'은 역사 속에으로 사라졌다.

사진은 반고굴(왼쪽)입구와 반고굴에서 바라본 산막공단 전경 . 김태권 기자

 

 

"1천400여 년 전 신라 29대 왕인 태종무열왕 때 원효(대사)

'수허몰가부위작지천주(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서라벌을 돌아다녔다.

이 노래의 뜻을 안 태종무열왕요석공주와 짝을 맺어주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은 3일 뿐'이라며 말한 뒤 사라졌다.

공주는 원효가 떠난 후 아들을 낳았고 백방으로 그를 찾았다.

공주는 원효가 삽량주 반고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을 데리고 갔다.

원효는 '공주와의 인연이 다했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공주는 원효를 설득하기 위해 반고굴 아래 마을에 (천막)을 쳤다.

 

어느 날 원효가 공주를 찾았다.

공주는 원효에게 아들을 보여줬다.

원효는 아들에게 '설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뒤 다시 반고굴로 돌아갔다.

공주는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결국 서라벌로 돌아갔다.

공주가 산(山)에 막(幕)을 쳤다고 해서 이 마을을 '산막(山幕)'이라고 불렸다. 
-양산시지-

원효 천성산 반고굴 기거
요석공주 안 만나고 거부
천막 치고 기다리다 해후
자비정신 변치 않고 이어져


경남 양산에는 원효대사요석공주, 아들 설총의 [애틋한 이야기]가 내려오는 '산막'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산막에서 천성산쪽으로 1㎞가량 올라가며 [원효대사가 수도했던] '반고굴'이 있다.


천성산은 당시 [호랑이가 많아 주민의 접근이 쉽지 않은] 신성스러운 곳이었다.

현재도 반고굴이 위치한 곳이 호계(虎溪)마을이다.

이 때문에 원효대사가 전국을 돌며 수도를 하다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30㎡ 규모의 반고굴에는 온돌을 만든 흔적

바위에 신라 때 조각한 마애불(경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도 있다.

특히 원효대사는 중국에서 찾아온 1천 명의 제자(신도)에게 화엄경을 강독해 모두 성인이 되게 했다.

1천 명의 제자가 성인이 됐다고 해 그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불렀고

제자에게 화엄경을 강독한 곳이 현재의 '화엄벌'이다.

산막에서 생산된 각종 농어산물은 사찰과 함께 삽량주 전체 주민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조선 말기 이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마을에 좋지 않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자

[마을을 두개로 쪼개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당시 [바깥산막]은 영동마을로, [안 산막]은 현재의 산막마을이 됐다.

하지만 1천400여 년을 이어온 '산막 정신'만은 계속됐다.

6·25 한국전쟁 때다.

이 마을에 백골부대가 주둔했었다.

백골부대는 산막마을에서 재충전을 가진 뒤 출전해 서울 수복과 함께 3·8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이 뿐만 아니다.

바깥산막인 영동마을

1970년대에 우리 국민들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과자'를 생산하는 롯데제과 공장 건립을 시작으로

양산에서 가장 빨리 공업지구로 조성돼 지역 발전을 견인해왔다.



2008년에는 산막마을에 대규모 공업지구가 조성되면서 원효대사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던

요석공주설총의 애틋한 이야기 속의 '산막'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에 [양산 시민을 먹여 살리는] 수백 개의 공장이 힘차게 가동되고 있다.

석굴암(반고굴) 무정 스님은 "신성스러운 천성산 기운을 가진 산막은 1천400년 전 삽량주 주민을 먹여 살린 것처럼 현재도 공업단지로 탈바꿈, 양산 시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불교와 원효대사의 '자비정신'이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권 기자 ktg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