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23> '대기근 예방'한 민 부사

금산금산 2014. 6. 21. 14:43

[부산의 전설 보따리] <23>

'대기근 예방'한  민 부사

대흉년에 고을민 목숨 구한 동래부사

 

 

 

 

                                               

                    대흉년 때 주민을 구제한 은혜의 보답으로 1838년 지경고개에 세워져 있다가

                   1993년 부산 금정구 부곡2동 공수물 소공원으로 옮겨진 '부사민공영훈 거사단비'.

 

 

 

 

 

 

- 장소: 동래구 수안동
- 풍년에 곡식 비축하라는 어머니 지혜 얻은 민 부사
- 돈 모아 전라도서 곡식 구해 가난한 주민들에게 나눠줘
- 백성들 은혜 못잊어 글자 새겨
- 1838년 거사단비 세워 제사
- 새 거사단비도 1993년 건립

장남인 민영훈은 [동래부사]로 부임할 때 어머니 최 씨를 모시고 왔다.

부임 첫날 초저녁에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돌아갈 행차를 준비하라"고 하였으나

새벽에 또 아들을 불러 "행차를 중지하라"고 말했다.


날이 새고 문안 인사를 여쭙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초저녁에 돌아갈 준비를 하란 말과 새벽에 행차를 중지하란 말뜻을 알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알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답했다.

 

어리둥절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 어제 저녁 천기를 보니 이 고을은 대살년(大殺年·대흉년)이라 이 고을 주민들이 죽는 꼴을

어찌 볼까하여 돌아가자 했다. 그러나 새벽에 천기를 보니 전라도 지방에 대풍년이 들 기운이라

힘만 쓰면 주민을 구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천기누설을 하지 말고 육방 관속을

점고(點考)한 후 이 고을이 변방인데 군량미가 얼마나 있느냐고 묻고 이 고을에서 거래되는 곡식을

다 사 모으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 거사단비 바로 옆에 위치한 새 거사단비.

민 부사는 어머니의 충고대로 곡식을 비축했다.

이듬해(1836년) 과연 어머니의 예언대로 이 고을은 물론

영남 일대에 흉년이 찾아 들었다 .

이 같은 조짐은 그해 초부터 있었다.

모심기 철에 찬바람이 불어 솜옷을 입고 모를 심었고

논을 멜 때도 샛바람이 불어 두꺼운 옷을 입었다.

결국 곡식은 자라지 않아 동래 고을 사정은 말이 아니었으나

전라도에서만은 그렇지 않다는 풍문이 돌았다.

민 부사의 어머니는  "너는 서울로 가서 돈을 모아 전라도에 가서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사 놓으라"고 분부했다.

이에 민 부사는 서울로 올라가 친구, 친척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닥치는 대로 돈을 구해 전라도에 가서 논떼기로 수만 석을

입도선매해 두었고 추수철에 그 곡식을 운반했다.

 

보리가 떨어질 무렵인 8월부터 객사(현재 동래시장)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 굶주린 주민들에게 나누어 먹이고 가난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보급했다.

그러나 남산, 노포, 두구동 주민들은 그 보급미로 지은 밥조차 먹기가 힘들었다.

양산 동면의 사송, 여락마을 주민들은 고을이 달라 식량 보급이 없자 야밤을 틈타

[지경고개]를 넘어와 지어놓은 밥을, 때로는 솥째로 훔쳐갔다.

그러자 당시 좌수 백달경이 동래부사에게 간곡한 소지를 올려 벼 수십 석을 얻어

사송, 여락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줘 기근을 면케 했다.

이후 양산의 사송, 여락마을 주민들은 민 부사의 은혜를 잊지 못해 사송마을

앞 큰 바위에 만인의 목숨을 구했다(萬人救命)는 글자를 새겼다.


동래지방의 마을 주민들은 동래부양산군의 [경계지점]인 지경고개

민 부사의 거사단비1838년에 세워 제단에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1993년 공수물 소공원(부곡 2동)에 원형 거사단비를 옮기고 옆에 신형 거사단비를 건립했다.

 

 

[거사비문]에는  '심한 흉년으로 부민이 굶어죽어 가는데, 곡식을 풀어 진휼하고 세금을 탕감하여 병폐를

                    제거하고 만인의 생명을 살린 그 은혜를 칭송한다'는 위민 공적이 기록돼 있다.

민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동래 고을 백성들은 매우 그 은혜가 컸기에

동헌에서 온천교차로까지 모두 적삼(상의)을 벗어서 행차의 대낫들이(큰 나들이) 길에 깔아

민 부사는 그들의 적삼을 밟고 걸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부민들이 얼마나 감복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