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전설 보따리] <31>
호랑이의 보은과 '최개동' 장군
호랑이가 지킨 아기, 커서 왜병 무찌른 장수
기장군 기장읍 내리 오신마을 돌사곡에 위치한 최개동 장군묘. |
- 장소: 기장군 기장읍 내리
- 최씨 부인 범새끼 구해주자 이후 어미호랑이 가족 보호
- 굴 속서 태어난 아기가 최개동
- 임진왜란때 주민·피란민 지켜
- 조정서 공을 기려 공신 책봉
옛날 기장군 앵림산(안적사 뒷산)
아홉골 하류 내리 입구 오신마을에 젊은 최씨 부부가 홀아비를 지극 정성을 다해 모시고 살았다.
남편은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부인은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
장에 팔아 생계를 도왔다.
어느 해 봄날 큰비가 내리는데 산골짜기에서 호랑이의 슬픈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큰비 다음 날 부인이 봄나물을 뜯으러 개울을 건너려고 하는데
새끼호랑이가 물에 흠뻑 젖어 징검다리에 걸려 떨고 있었다.
부인은 새끼호랑이를 불쌍히 여겨 치마폭에 싸서 물을 닦아내고
간밤에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라 범굴을 찾아 새끼를 두고 나오니
멀리서 어미 호랑이가 보고 있었다.
부인은 혹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이후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올라 몇 차례 어미호랑이와 새끼호랑이를 마주쳤으나 화를 입지 않았다.
정무공 최개동 장군비. 묘와 비에는 최개동 대신 최진태로 적혀 있다. 이는 후손이 개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이듬해 여름 초저녁 시아버지가 저녁을 먹고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다.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만삭인 부인이 십리나 떨어진 기장읍내의
약방에 복통약을 지으러 갔다.
약을 짓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소나기가 내리면서 몸에 출산기가 있어
인근 범부골의 범굴에 가서 사내아기를 해산했다.
한편 남편은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편은 만삭인 부인을 찾고자 산길을 나섰다가 큰 호랑이를 만났다.
하지만 호랑이는 덤벼들지 않고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호랑이의 뒤를 따라 범굴에 도착하자
순간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출산한 부인과 갓난아이가 있었다.
그 갓난아이가 커서 임란창의공신(壬亂倡義功臣)이 된
최개동(崔介同)장군이다.
최개동은 체구가 크고 용맹스러워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근처 마을을 급습, 노략질을 하고
겁탈을 서슴지 않자 그는 격분해 닥치는 대로 왜적들을 때려 죽였다.
이후 그는 기장읍 내리마을 뒤 앵림산에 들어가서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 지역 주민들도 왜적을 피해 이 산속에 숨어 살았다.
이후 왜적들은 이 깊은 산속까지 쳐들어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유린하며 만행을 부렸다.
이 처참한 광경을 본 최개동은 왜적들을 활로 쏴 수십 명을 죽였다.
이후 왜적들은 이 무서운 장사에게 지레 겁을 먹고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기회를 노리던 왜적들은 어느 날 수많은 동료를 앗아간 분풀이를 하려고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최개동 장군이 살고 있는 토막집을 급습했다.
자다가 기습을 당한 최개동은 미처 활과 칼을 찾을 겨를을 놓치자
집 안에 있는 몽둥이를 들고 나와 우레 같은 고함을 치면서 닥치는 대로 왜적들을 죽였다.
내리마을의 많은 피란민들은 최개동 장사에게 의지해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퍼지자 왕은 그의 창의(倡義)의 공로를 높이 사 공신록에 등재했다.
정무공최개동장군묘는 오신마을 뒷산 돌사곡(돌을 쌓은 골짜기·기장읍 내리 산 27의 9)에 있으며,
부산진구 주례동 최씨 문중에서 매년 10월에 묘사를 올리고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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