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33> '낭백' 스님과 '조엄'

금산금산 2014. 10. 18. 10:13

[부산의 전설 보따리] <33>

'낭백' 스님과 '조엄'

 

 

 

무주상보시 실천한 스님, 관찰사로 환생

 

 

 

 

범어사 옛길 비석골에 위치한 5기의 비석 중 가운데가 낭백 스 조엄의 환생 전설을 담고 있는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비이다.

 

 

- 장소: 금정구 청룡동
- 사찰 부역 40여 종 면해주고
- 마음껏 도 닦게 해달라 기도
- 모든 재물 나눠주며 빈몸 정진
- 전생 깨달은 경상도 관찰사
- 스님 뜻 실현…환생 전설 입증



조선 중기 [동래 범어사]에 법호가 낙안(樂安)낭백(浪伯)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낭백 스님은 일찍이 범어사에 입산해 신심을 갖고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수행하였으며

특히 보시행을 발원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타인을 위해 바쳤다.

무엇보다 스님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염원을 결국 이뤄냈다.

조선시대 배불숭유정책에 의한 불교의 폐해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특히 조선 중기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박해는 극에 달해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해

일개 사찰에 부여된 부역의 수가 무려 40여 종에 이르렀다고 전해온다.

낭백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낭백 스님은 남몰래 부처님 앞에 나아가

 "하루라도 속히 금생을 마치고 내생에는 큰 벼슬에 올라 도 닦는 스님들이

관권 구속과 혹사 없이 도를 닦을 수 있도록 제가 보살피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스님은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다.

낭백 스님은 보시정신을 갖고 자기가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나눠주었으며,

빈몸으로 나아가서 힘이 닿는 대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큰 원행을 스스로 실천했다.


스님은 지금의 금정구 부곡3동인 옛날 기찰마을 부근에서 동래로 들어가고 나가는 황산도 길목

큰 소나무 밑에 샘을 파서 행인들에게 식수를 제공했고 너른 밭을 개간해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수확해

행인에게 무한정 보시했다.

또 기장으로 넘어가는 칼치재에 초막을 지어 거기서 짚신을 삼아

고개를 넘나드는 행인들에게 신을 시주하는 등

온갖 일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줬다.


스님은 늙은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기 위해 범어사로 올라가 한 행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주린 호랑이에게 보시를 하고 가기로 작정했다.

금정산 밀림에서 3일 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겠다."



스님은 또 죽기 전에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유서로 남겨놓았다.

 '만일 다시 태어나 나라의 고급관리가 돼 범어사로 올 때 모든 관리가 조계문(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렸지만 자신은 이보다 아래인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이 문을 닫는 자가 이 문을 열 것이며(開門者是閉門人),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세월이 흘러 경상도 관찰사로 조엄(1719~1777)이 새로 부임, 각 군을 순찰하고 범어사를 찾았다.

조엄은 다른 관리와 달리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사찰을 돌다가 낭백 스님 방 앞에서 기어이 문을 열라 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 보니

낭백 스님의 친필 유묵이 얼룩져 있었다.

 

 

조엄은 스님에게 그간 절의 사정을 물었다.

스님들은 하나같이 "36종의 잡역으로 고생한다"고 답하니 단번에 잡역을 면제해 주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약속했다.

스님이 "오늘이 낭백 스님이 돌아가신 지 24년이 되는 날"이라고 하니 조엄 관찰사는

그제서야 자신의 전생이 낭백 스님이었음을 깨닫고, 그 후부턴 평생을 통해 많은 불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은 조엄 관찰사가 낭백 스님이 살아 생전 맹세한 다짐을 실현하였다는 인과응보의 좋은 본보기이며,

범어사 옛길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비가 환생 전설을 입증해주고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