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新전설의 고향] 양산 '삼장수'

금산금산 2014. 10. 18. 10:57

[新전설의 고향] 양산 '삼장수'

 

 

 

영축·천성·금정산 품은 태몽 뛰어난 무장 '충절·기개'의 표상

 

 

 

 

 

삼장수가 태어난 생가. 이 생가에는 장남인 징석이 후손이 640여년째 살고 있다.

 

"640여 년 전 고려 공민왕 때 순무어사였던 이전생(李全生)이 왕명을 받고 전국을 순찰하던 중

 경남 양산에서 명당을 발견했다.

이전생은 9년 뒤 양산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징석, 징옥, 징규 삼형제를 얻었다.

이전생 부인은 영취산(영축산)이 걸어와 속곳 가랑이로 들어오던 꿈을 꾼 뒤 장남인 징석을 가졌다.

또 징옥은 원적산(천성산)이, 징규는 금정산이 각각 들어오는 꿈을 꾼 뒤 가졌다.

삼형제는 무럭무럭 자랐다.

서당에 가고 올 때는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

하루는 서당에서 돌아올 때 50여 명의 도적떼를 만났지만 삼형제가 힘을 모아 물리쳤다.

이후 도적이 이 마을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3형제 차례로 혁혁한 무공
둘째 이징옥 난 일으켰지만
세조, 다른 형제 적극 구명
시, 관광 자원화 활발


징석은 17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서북 변방의 사군 설치 때 용맹을 떨쳤다.

그는 절도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세조 때 좌익공신으로 책록되고 종일품인 숭록대부 양산군에 책봉됐다.

17세 때 무과에 급제한 징옥도 육진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문종 때는 종일품인 숭정대부에 올랐다.

징규도 18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판관감찰직을 거쳐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무인으로서 최고 벼슬인 종일품에 올랐다.

징석, 징옥, 징규 삼형제가 장수(장군)가 됐다고 해 삼장수로 불렸다."

- 양산 고을 옛이야기

 


경남 양산시 하북에는 징석, 징옥, 징규 삼형제가 태어난 생가가 있다.

생가는 뒤쪽에 영축산이, 앞에는 천성산과 금정산이 보이는 삼수리에 위치해 있다.

삼수리는 삼장수가 나왔다고 해 초산리에서 분리됐다.

삼장수의 아버지인 이전생은 조선 태종 때 관직에서 물러나 삼수리로 돌아 왔다.

태종은 이전생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를 양산부원군에 책봉했다.

9년 뒤(1416년) 군명(郡名)마저 양산으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양산의 유래가 됐다.

삼수리 입구에 삼장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1992년 후손인 양산 이씨 문중에서 세웠다. 김태권 기자

 

삼수리에는 삼장수와 관련된 유적도 많다.

셋째인 징규가 평소 입었던 갑옷을 보관했던 갑옷바위를 비롯해 활쏘기를 즐겼던 활소대,

천하의 명마를 몰라보고 죽인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친 도마교다.

그러나 징석, 징규 형제는 둘째인 징옥이 일으킨 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세조는 "지금은 반역을 한 신하(징옥)이지만 후세에는 너를 두고 충신이라 할 것이다.(금세지난신후지충신:今世之亂臣後世之忠臣)"라고 말하면서 측근 신하들이 무려 13차례에 걸쳐 징옥 형제들을 주살해야 한다는 상소를 무시하고 징석, 징규 형제를 구명했다.

세조는 징석과 징규 형제의 관직을 유지시켰다.

이는 세조도 삼장수를 뛰어난 장군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징옥 장군에 대한 역사학자의 재평가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양산시도 시민들의 애향심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충절과 용맹의 표상인 삼장수를 새로 조명하고 나섰다.

시는 2012년 경남지역 대표적인 축제인 삽량문화축전에서 삼장수의 진취적인 기상을

춤동작으로 표현한 '삼장수 기상춤'을 선보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에는 '삼장수 밥상'은 물론 '삼장수 뮤지컬'까지 제작했다.

시는 또 삼장수가 태어난 삼수리 일대를 관광자원화하기로 하고 정비계획도 마련했다.



양산시 관계자는 "삼장수는 신라시대 충신인 박제상 공과 함께 양산의 최고 충절의 표상"이라며

"삼장수를 지역의 대표적인 충절과 기개의 표상으로 개발해 보급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태권 기자 ktg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