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진사'와 대장골 '산적'
나눔문화 실천한 수정마을 큰 부자
옛날 화명에서 동래로 가는 길인 대장골의 현재 모습. |
- 장소: 북구 화명1동
- 동네 주민 약탈 않는다는 조건
- 매년 산적들에 곡식 등 나눠줘
- 구포장터 재건 거액 성금 기부
- 일제시대 독립자금도 내놓아
옛날 화명에서 동래로 가는 길인 대장골(大莊谷·대적골 대정골로도 불렸음)의 뒷산은 산적의 본거지였다.
산적들은 해마다 대장골 아랫동네인 수정(水亭)마을에 나타나 집집마다 곡식을 약탈해갔다.
당시 수정마을에는 큰 부자였던 허섭(許攝·1862년 출생)이라는 진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을사람들을 대표해 산적들에게
"앞으로 내가 충분한 곡식을 줄테니 약탈하지 말라"고 말하며 협약을 맺었다.
해서, 산적들은 해마다 한 번씩 정례적으로 허 진사댁에 와서 양식을 받아 갔다.
아파트촌으로 변한 수정마을에는 표석만 남아있다. |
산적 두목의 연락책을 맡은 부하가 허 진사댁을 찾아 "며칠 후에 우리가 올 것이니 곡식을 찧어 놓고 준비해 달라"고 통보를 하는 식이었다.
지정한 날이 되면 산적들은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집집마다 대문을 잠그고
부녀자를 숨겨 놓고 바깥 출입을 모두 하지 않았다.
산적들은 앞산에 와서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법석을 떨었고, 허 진사
댁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 음식을 준비해 놓고 하인을 시켜
산적들을 인도했다.
산적 졸개들이 마당에서 대접을 받는 동안 두목과 허 진사는
사랑채에서 대작을 하며 갖고 갈 곡식 등을 흥정했다.
흥정이 끝나고 나면 산적들은 곡식 등을 받아 유유히 사라졌다.
산적의 본거지와 가까운 수정마을은 부자인 허 진사 한 사람의 공덕으로
피해를 줄여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수정마을에서 태어난 허 진사는 고향에서 마을을 지키며 살다
1894년(고종 31년) 진사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나눔문화를 온몸으로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는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 땐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적지 않은 기부를 하였다.
1914년 구포장터에 큰불이 나자 장터를 재건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 때
당시 구포은행이 낸 150원보다 더 많은 160원을 선뜻 내어 애향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년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1번지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자금을 모으러 연락원이
수정마을을 찾았을 때도 허 진사는 엄청난 독립자금을 선뜻 내주었다고 한다.
큰 부자로 소문났던 허 진사댁은 수정마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궐만 했던 그 집은 다섯 대문을 지나야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한옥이었다.
구조 양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문 앞에선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리면 연자방아와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이 있었다.
남쪽으로 허 씨 집안의 독서당이 있었다.
위채는 3칸 집으로 서당 훈장댁이고 아래채는 3칸 접집으로 서당이었다.
첫째 대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왼쪽 큰 마당은 타작마당이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둘째 대문이 나온다.
안쪽은 사랑채로 5칸 접집이 있었다.
오른쪽 셋째 대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5칸짜리 창고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4칸짜리 디딜방앗간과 쇠마구간이 있었다.
넷째 대문을 들어서면 본채 5칸 접집이 있었다.
지붕은 쇠나리(갈대)로 얹었으며 위채와 사랑채는 서향집이었다.
다섯째 대문 맞은편 남쪽으로는 5칸 안채가 있었다.
그 뒤편으로 북쪽과 동쪽이 대밭으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였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
'전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의 전설 보따리] '한 부사'의 젓가락 (0) | 2015.01.10 |
---|---|
[부산의 전설 보따리] 달음산의 '산삼' (0) | 2015.01.03 |
[부산의 전설 보따리] <42> 용동골마을의 '천국부'와 '장터걸' (0) | 2014.12.20 |
[부산의 전설 보따리] <41> '마하사'와 '나한' 전설 (0) | 2014.12.13 |
[부산의 전설 보따리] <40> '망부송'에 얽힌 '부부사랑' (0) | 2014.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