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사'의 젓가락
꿈에 동래 내려와 대접받은 청백리 재상
동래유치원(동래구 칠산동 246번지) 내에 위치한 '부사 한공배하 거사단'비 |
- 장소: 동래구 복천동
- 부사 재임중 온정 베푼 한배하
- 재상 자리 올라 고을 떠나자
- 백성들 생사단 지어 제향 올려
- 어느날 취기로 조정 조회 참석
- 숙종은 음주 확인차 관차 파견
- 실제 상위에 첨저(젓가락) 놓여져 있어
조선 숙종 때인 1706년 영남지방에 심한 가뭄이 계속될 때
한배하(韓配厦)가 동래부사(재임 1706 ~ 1709)로 부임했다.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만 짓던 백성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있던 부사는 무엇을 결심했는지
객사 앞에 장작을 쌓게 하고는 "내가 목민(牧民)의 관장으로 이곳에 와서 이 참상을 보는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이니 스스로 죽을 것을 각오했소. 백성은 부디 편안하게 살아가길 빌 뿐이오"라고 말하며
장작더미에 불을 붙일 것을 명했다.
하인 중엔 불을 지필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재차 엄하게 꾸짖으니 한 하인이 눈물을 머금고 불을 지폈다.
장작더미 위에 태연히 앉은 부사의 옷깃에 불이 붙을까 말까 할 때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이틀 동안 내려
백성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한배하는 동래부사로 재임하는 동안 늘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그 이름이 자자했고,
이후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가 떠난 후 백성은 생사단을 지어 제향을 올렸다.
지금 동래유치원 내에는 '부사 한공배하 거사단'비가 이를 입증한다.
한배하가 재상으로 있을 당시엔 당쟁이 심했고, 백성에게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다.
하루는 조정 조회(朝會) 때 한 재상이 불콰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이를 본 반대파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상감마마, 만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재상이 나라에서 금한 술에 취해 국사를 논의하는 조회에 나오니 이를 묵과할 수 없사옵니다. 마땅히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아뢰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한 재상은 "말씀 올리기 황공하오나 소신은 매년 9월 9일 꿈속에서 오래전 부사로 지내던 동래에 가서 술과 음식의 대접을 받습니다. 간밤에도 동래에서 마신 술의 취기가 아직 덜 가신 듯 하옵나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제향 때는 술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대파들은 한 재상을 두고 제향을 핑계 삼는 비겁자라고 반박했다.
한 재상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사옵니다. 어젯밤 제향에 갔더니 하필 소신 앞에 젓가락이 없어 옷에 찼던
첨저(尖箸·양반이 갖고 다니던 작은 칼집 안의 젓가락)를 뽑아 먹었사오나 돌아올 때 그 첨저를
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 기이하게도 그 첨저가 없으니 동래부사에 관차(官差·관아에서 파견하는 아전)를 보내 확인하심이 어떠하오리까?"라고 말했다.
해서, 숙종은 즉시 동래에 관차를 내려보냈다.
비슷한 시각, 동래에서도 향사에 차렸던 제물을 치우다 보니 한 부사 자리에는 젓가락을 놓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첨저가 하나 있어 모두들 법석거리고 있었다.
동래 관헌들은 이 신기한 일을 그대로 둘 수 없어 한양의 한 재상에게 알리기 위해 통인(通引)
한 사람을 막 보내려고 하던 차에 한양의 관차가 도착했다.
마을사람들로부터 향사를 지내고 있는 곡절에서부터 재상의 첨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실을 들은 관차는
한 재상의 것으로 추정되는 첨저까지 받아 숙종께 바치고 모든 사실을 고했다.
본래 한배하가 청렴결백한 사람인 줄 믿고 있던 숙종은 이 보고를 듣고는 그를 더욱 신임해
정승의 자리까지 승차(陞差)시켰다고 한다.
가마골향토역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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