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48> 천승호 부부의 효열(孝烈) 이야기

금산금산 2015. 1. 31. 08:27

천승호 부부의 '효열(孝烈)' 이야기

 

 

 

천성으로 타고난 효심, 산적들도 탄복

 

 

 

1990년 금곡중학교 앞에 있던 천승호 부부의 효자열려정려비(오른쪽)는 현재 금곡청소년수련관 정원으로 옮겨졌다.

 

 

 

 

- 장소: 북구 금곡동
- 조선 후기 효자의 대표적 표상
- 모친 약 구할 돈 빼앗길 위기
- 한눈에 알아본 산적 되레 사과
- 배필도 30년간 시모 공양 몰입
- 남편 운명 뒤 유언 남기고 따라
- "人 행실 으뜸은 어버이 섬김"



금곡동 율리마을에서 태어난 천승호(千乘昊·1817~1866·천만리의 9세손)

조선 후기 지역 효자의 대표적 표상이다.

그는 어머니가 일찍이 풍담(風淡)으로 여러 달 병석에 누워 있지만 입은 옷의 띠를 풀지 않고

 병문안을 오는 지인들에게 약을 물었다.

한 의원이 풍담에는 능구렁이〔花蛇〕가 좋다고 일렀지만 때가 겨울이었다.

하지만 천승호는 하늘을 부르며 묻고 또 물어 결국 눈 쌓인 산속에서 능구렁이를 얻어 어머니 병을 낫게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좋은 약과 음식을 구할 길이 없자 송아지를 장에 팔아 10꿰미를 받았다.

하지만 집으로 오는 도중 산골에서 산적을 만나 그만 돈을 빼앗겼다.

천승호는 산적에게 "이 돈은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라며 눈물로 간청했다.

산적들은 가만히 천승호를 보더니 "당신이 효자 천승호인가"라고 물었다.

천승호는 "이름은 맞으나 효자는 아니다"라고 답하자

산적들은 "당신의 이름은 일찍이 귀가 따갑게 많이 들었소.

비록 흉년으로 모두들 어렵지만 어찌 효자의 돈을 뺏어 모친의 봉양을 못 하게 하리까"라고 말하며

백배사과하고 그냥 가버렸다.

승호의 지극한 효심이 능구렁이가 스스로 굴에서 나오게 하고, 산적들을 감동시켜 교화를 시킨 것이었다.

하늘도 그의 효심에 감탄을 했는지 천승호에게 효심이 지극한 배필을 안겨 주었다.

그는 23세 때 경주 이씨와 결혼했다.

부인은 전통 가문의 딸로 천성이 순수하고 바탕과 행실이 정숙해 온갖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물을 긷고 방아 찧고 길쌈하기를 30여 년.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혈기가 이미 쇠약해도 며느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 천승호와 함께 아침 저녁으로 방이 차고 더운가를 살피며 문안 여쭙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온 마을사람들이 감화돼 시모를 섬기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천승호 부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만일 천성으로 타고난 효심이 없었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깊이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인명은 재천이라 했던가.

남편 천승호가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해졌다.

부인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지만 성과가 없자 목욕 재계 후 매일 밤 하늘을 바라보며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끝내 남편은 운명했다.

주위의 우려와 달리 부인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있는 것이니 애통해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며

되레 슬픔을 절제하며 시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는 장례 절차를 모두 친척들에게 맡기고 애오라지 시모 공양에 몰입했다.

 

 

장례 이튿날 며느리 이씨는 자식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는 날, 이미 나는 즉시 하늘나라로 따라가기를 결정했다.

다만 너희들 할머니가 계셔 거듭 마음의 상처를 드릴 수 없어 고민해왔다.

지금 나는 네 아버지 상복을 입었고, 할머니의 마음도 너그러워진 데다 할머니를 봉양할

또 다른 며느리인 아랫 동서가 있으니 하늘나라로 갈 결단을 내려야겠구나.

내가 죽더라도 좋은 음식은 차리지 말거라.

너희들은 섬겨야 할 할머니가 계시고, 나는 하늘나라에 남편이 있으니 지금부터 길이 따르리라.

사람의 모든 행실 중 어버이 섬김이 으뜸이다.

또 가정 다스리기에 힘쓰고 집안의 명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써 노력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이후 그는 곡기를 끊은 지 7일 만에 남편을 따라 하늘나라로 떠났다.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자 남편은 어질고도 효성스럽고, 그 아내는 효도와 정렬(貞烈)을 겸비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고종 9년인 1872년 4월 조정에선 효자 천승호에게 통훈대부사헌부감찰, 그 처에게는

숙인이라는 벼슬의 교지가 내려졌다.

이후 그 해 11월 16일 효자열려정려비를 금곡동 율리마을 입구 도로변에 세워 후세에 귀감으로 삼게 하고,

그 자손에게는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해 주었다.


정려비는 1990년 도로 확장으로 인해 지금의 금곡중학교 앞으로 옮겼다가

이후 금곡청소년수련관 정원으로 옮겨져 찾는 이로 하여금 효자와 열녀의 산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