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용두산'의 호랑이

금산금산 2015. 2. 28. 13:43

'용두산'의 호랑이

 

 

 

 

겨울철 호환(虎患)공포가 일상이던 倭 무역전초지

 

 

 

 

 

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북쪽 일대의 전경(1905년경). 바다 건너 보이는 땅이 지금의 영도 땅인 절영도이다. 부산박물관에서 펴낸 '풍경2도시'에 있는 사진을 스캔받아 사용했다.

 

 

 

 

- 장소: 중구 광복·동광·대청동
- 숙종 4년 용두산 자락의 왜관에
- 호랑이 수시 출몰해 사람들 위협
- 절영도 헤엄쳐가 목마장 습격도
- 포수 동원한 포획작업 연례행사

산의 모습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하여 명명된

 용두산(龍頭山·49m)은 조선시대 땐 소나무가 울창해 송현산(松峴山)이라 불렸다.

동래부에서 소나무를 기르는 특별한 봉산(封山)이기도 했다.

1678년(숙종 4)에는 이 산을 중심으로 초량왜관이 조성돼 대일무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용두산의 호랑이가 수시로 나타나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보고문서를 통해 살펴본다.


1771년(영조 47) 호랑이가 왜관의 담을 넘어 쳐들어오자

 왜관 도자기 가마 위쪽에서 "호랑이가 나왔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왜관에 있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소리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대대적인 포획극이 연출된 것이다.


서관 쪽에 있던 무사가 호랑이와 맞닥뜨렸다.

 창으로 찌르려 하자 호랑이가 피해 달아났다.

맞은편에 서 있던 수문장이 총을 한 발 쏘았다.

총을 맞은 호랑이가 순간 비틀거리더니 수문장 쪽으로 달려들 태세였다.


이때 한 무사가 뛰어들어 창으로 호랑이를 여러 차례 찔러 숨통을 끊었다.

 그 무사는 이후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안개를 내뿜듯 워낙 커 오장육부에 그 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설명했다.

잠시 숨돌릴 겨를도 없이 재판가(裁判家·외교 교섭 업무) 위쪽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또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가 총을 쏴 어깨 쪽에 명중시켰다.

그러자 호랑이는 수풀 쪽으로 도망쳤다.

 기세를 올린 그 무사는 재빨리 따라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허리 쪽에 다시 한 발을 더 쏘았다.

탄환은 허리를 관통했다.

그래도 호랑이는 통사가(通事家·통역 업무) 방향으로 달아나 산 쪽으로 숨었다.


무사는 포기하지 않고 호랑이를 뒤쫓았다.

 때마침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이 "호랑이가 저기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무사가 호랑이를 겨누기 위해 나무 위에 오르는 순간 호랑이가 달려들어 무사의 발을 물고 늘어졌다.

무사의 비명을 들은 왜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호랑이의 콧방울에서 눈 아래쪽 부분을 칼로 찔렀는데도

호랑이는 무사의 발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후 머리 다리 등 몸 전체를 한꺼번에 찔리고 나서야 물고 있던 무사를 놓아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왜인들에게 달려들 태세였다.

 이 중 체구가 육중한 가마꾼 왜인이 앞으로 나가 손도끼로 호랑이 머리를 내리쳐 넘어뜨렸다.

 그제서야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호랑이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 데 성공했다.

맨 처음 잡힌 호랑이는 내장을 끄집어낸 후 전신을 소금에 절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손상이 심해 가죽을 벗겨낸 다음 머리는 호두골(虎頭骨·호랑이 얼굴)로 만들었다.


왜관의 관리들은 이를 호랑이 포획상황을 상세히 적어 보고서와 함께 대마도로 보냈다.

 나머지 살은 관수가(館守家·관수 숙소 겸 집무소) 뜰에서 구워 먹었다.

당시 그날은 개시(사무역 장소)가 열리던 날이었다.

해서, 조선의 관리와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진 대대적인 포획이어서 입에서 입을 통해 널리 퍼졌다.

특히 눈앞에서 본 사람들은 "살아 있는 호랑이를 붙잡는 장면을 처음으로 구경했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마도에 전달된 보고서는 역관을 통해 동래부사에게도 전달됐다.

 다음날 동래부사는 이를 치하하는 의미로 백미 두 가마를 왜관으로 보냈다.

부상을 입은 무사에게는 '묘약'이라 하여 닭 4마리를 하사했다.


용두산의 호랑이 이야기는 '초량화집'에도 언급돼 있다.

 이에 따르면 겨울철 먹이가 귀해지면 용두산 호랑이는

초량항을 건너 절영도로 이동해 목마장의 말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목마장의 사동(使童)은 해안 경계를 철저하게 했지만 호랑이들은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 해조류를 모자처럼 얹고 상륙했기 때문에 호랑이를 놓친 적이 많다고 한다.

해서, 목마장의 감목관(監牧官)은 포수를 동원해 호랑이를 잡는 것이 연례행사였다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이런 얘기도 전해온다.

 1633년 선위사(宣慰使) 이민구는 일본사신 접대를 위해 절영도 수렵에 동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서 숲을 수색하며 나아가자

호랑이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울부짖으며 벼랑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