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부산 도심 여행] 대저동 신평마을 '비행기 격납고'집

금산금산 2015. 4. 29. 14:07

대저동 신평마을 '비행기 격납고'집

 

 

 

 

왕의 무덤처럼 지은 일제 '비행기 창고' 이젠 서민들 터전이 되었구나

 

 

 

 

부산 강서구 대저동 울만리 신평마을에 있는 '격납고집' 가운데 이성렬 씨 가옥. 이 씨의 부친은 격납고를 집으로 가꾸기 위해 몇 달 동안 안에 있던 흙을 파내었다고 한다. 최원준 시인 제공

 

 

 

 

 

- 일제시대 건설 신평마을 격납고
- 남은 4곳 개조, 가정집으로 사용
- 굴 속 같이 편안하고 아늑해
- 장갑공장·농장으로 쓰이기도

- 현재 국방부 소유 땅에 자리
- 귀중한 전쟁문화재 보존해야


"이 집은 원래 비행기 격납고였어요. '아까돔보(빨간 잠자리)'라고 잠자리비행기 알지요?

일본군들 훈련비행긴데 '빨간 잠자리비행기'라고 '아까돔보'라 하데요.

이 '아까돔보'를 한 대씩 넣어두던 격납고가 바로 이 집이라~.

마을 주변으로 20개나 있었어요. 지금은 공항 넓히고 한다고 다 헐리고 4곳만 남아 있지요."

부산 강서구 대저동 신평마을 이상렬(64) 씨의 말이다.



대저동 울만리 신평마을.

김해비행장 서북쪽, 제5공군전술비행단의 담과 이웃한 마을이다.

이곳에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비행기 활주로와 격납고가 있던 곳.

이 마을 몇몇 가구는 현재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를 개조가정집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 비행기 격납고를 가정집으로

젖소 사육농가에서 창고로 쓰는 격납고집.

격납고집을 찾아 강서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배종진 연구위원과 함께

신평마을로 갔다.

 '신평 입소길'을 따라 공군부대 담과 추수를 끝낸 들판이 펼쳐진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표지석과 경고문 표지판이 마주 보고 서있다.

경고문 내용 중 '국방부 국유토지 사용허가 지역'이라는

붉은색 글귀가 선명하다.

이 마을이 국유지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마을사람에게 물어보니 역시 토지사용료를 주고 영농을 하며

거주하고 있다.


원래 신평마을 주변 울만리는 갈대가 무성한 저습지였다.

배 위원의 말로는 "울만리 사람들은 평소에 늘 장화를 신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늪지대로 유명했다.

이곳을 원주민들이 억척스레 개간해 대저 최고의 비옥한 토지로 만들었다.


"태평양전쟁이 치열했던 시절, 일제는 군용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려고 원주민을 강제이주시킵니다.

그리고 인근 주민을 동원해 활주로와 격납고를 건설하지요. 이때 칠점산과 평강천 너머 덕도산을 깎아

그 흙과 돌로 평탄작업을 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곳에 귀환동포와 원주민들이 돌아와 마을을 이루는데, 이때 남아있던

비행기 격납고를 주택이나 창고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상렬 씨 부친도 신평으로 들어온다.



"저희 어른이 일본 귀환동포였어요. 고국에서 농사지으려고 이곳으로 왔지요. 갈대밭을 개간해서

논도 일구고 그랬어요. 처음에 격납고를 불하받고 보니 격납고 안이 흙으로 꽉꽉 들어차 있더라고요."

격납고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버려두고 갔던 것이다.

"우리 어른이 격납고 안의 흙을 몇 달 동안 파내어 이 집을 들여앉혔지요."



격납고를 만들 때는 먼저 '왕의 무덤'처럼 흙을 크게 다져 쌓아올린다.

그 위에 갈대로 만든 돗자리를 깔고, 자갈을 섞은 콘크리트를 타설한다.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으면 속에 채운 흙을 파내어 격납고를 완성하는 것이다.

워낙 튼튼하게 지어 내부가 마치 자연동굴 같다.



■  마을사람들 '굴집'으로도 불러

면장갑을 만드는 태용산업은 격납고

를 공장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격납고집' 사람들은 이 집을 '굴집'이라 한다.

"집 안에 들어오면 꼭 굴속 같거든요. 참 편안하고 아늑해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고…. 울만리 사람은 '굴집'이라 하면

다 알아들어요."

그도 그럴 것이 집 외벽을 무려 60~70cm 두께의 자갈 콘크리트로

양생했으니, 요새가 따로 없다.

 미군 B-29 폭격기의 폭격에 대비해 만들었다니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니 60년 넘게 이 '굴집'에서 사람이 살지 않겠는가?

 

 

격납고는 측면으로 둥근 지붕을 2단으로 만들었다.

비행기 앞부분이 들어가는 앞의 지붕은 크고 넓게 만들고, 비행기 꼬리 부분이 들어가는 격납고 뒤편은

지붕이 작고 낮다.

정면 20m, 측면 12m, 높이 4m 정도의 크기다.

현관이 있는 정면은 병영막사처럼 반원 형태인데, 양옆이 길게 벌어져 있어 안정감을 준다.


"큰 지붕 쪽으로 방이 3개 앉았고요, 뒤쪽 작은 지붕으로는 주방이 있어요.

현관 양쪽 낮은 공간은 창고로 사용하고요."

넉넉한 집 구조와 쾌적한 실내공간에 이 씨는 꽤나 만족하는 듯하다.

오래도록 돼지를 사육했는데, 손을 다쳐 일을 놓고 있다는 이 씨.

그의 쾌유를 빌며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긴다.

장갑 제조업체 '태용산업'을 운영하는 강민규 씨 소유의 격납고를 찾았다.

멀리서 보니 외관 전체의 하늘색 방수페인트가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현재 강 씨 소유의 격납고는 일명 '목장갑'이라는 면장갑을 제조하는 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장갑공장이 된 격납고

격납고 내부는 장갑 짜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다.

20여 대의 기계가 쉴 새 없이 장갑을 짜는데, 전 공정이 기계화되어 사람 손은 그다지 필요치 않다.

오로지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실 풀리는 소리만 격납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공장 옆으로 주택과 사무실을 만들어 놓았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 강아지 세 마리가 콩콩 짖어댄다.

"선친께서 이곳에 개를 키우시다가 88년부터 장갑공장을 시작하셨어요.

지금은 제가 이어받아 공장을 운영합니다. 처음에 하얄리아부대에 납품했어요.

그땐 경기가 좋았죠. 지금은 베트남 등에서 값싼 장갑이 밀려 들어와 힘들어요."

혼자 기계 운용 및 수리 일체를 도맡아 하는 강 씨의 어깨가 더없이 미덥고 든든하다.


또 다른 격납고집으로 향한다.

김성도 씨 주택이다.

김 씨의 격납고집은 외관을 개량 한옥으로 개조했다.

높이 솟은 지붕이며, 넓은 창호와 현관문이며, 전원주택과 다름없다.

"비가 하도 새서 1000만 원 주고 다 고쳤어요. 굴집은 그대로 두고 바깥을 한옥으로 감싸 둘렀지요.

겉으로 보기엔 굴집인지 아닌지 모르겠지요?"라며 안주인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주택 뒤로 가보니 격납고의 작은 지붕이 보인다.

일반 주택에 격납고 지붕을 꼬리처럼 달고 있는 형태다.

이곳은 빈 공간으로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 주위로 채마밭이 조성돼 있는데 무와 시금치가 푸릇푸릇 한창이다.

늦은 계절에 열매를 맺은 무화과도 탱글탱글 실하기만 하다.

격납고 4곳 중 나머지 한 곳은 젖소를 사육하는 농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앞쪽을 다른 격납고집처럼 콘크리트로 막지 않아, 원래의 격납고 입구 외형을 가늠케 한다.

현재 젖소 사료와 약품 등을 보관한다.

맹인안내견으로 알려진 골든 레트리버 종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격납고를 지키고(?) 있다.

 

 



■ 귀한 전쟁문화재, 보존방법 찾아야

신평마을의 격납고들은 현재 주택으로, 공장으로, 창고로 쓰인다.

잘 보존된 것도 있고, 방치되다시피 한 것도 있다.

이들은 현재 국방부 소유의 땅에 자리하고 있어, 언제 자리를 비켜야 할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 격납고들은 부산의 근대건축물 중 아주 귀중한 전쟁문화재이다.

더구나 질곡의 근현대사를 신산하게 살아온 서민들이, 피곤한 몸을 뉘었던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와 밀양 상남면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

이미 등록문화재 39호와 206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신평마을 격납고집'들도 더 훼손되기 전에 보존방법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신평마을을 가려면 도시철도 구포역이나 강서구청역 버스정류소에서

강서 11번 마을버스를 타고 신평마을에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