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쑤' 동래!~ 부산 동래구
풍수 좋은 동네에 풍류 있네
일제강점기 시절 부산의 한 사대부 잔칫집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 동래기생들. 당시 기생들은 일반인이 엄두도 못낼 인력거나 택시를 타고 다닐 정도로 화려한 생활을 했다. |
- 산지와 평지 절충한 동래읍성, 장풍득수 이룬 명당
- 온천장 신라시대 왕들 즐겨 찾을 정도로 효험 좋아
- 이후 대중문화 한 축 담당 향락문화 최고 유원지로
■ 동래가 품은 동래읍성
동래(東萊)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삼한시대 변한 12국 중 독로국(瀆盧國)의 중심지였으나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으로 되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지방행정제도를 개혁할 때 동래군으로 개칭되면서 동래라는 이름이 유래됐다.
동래라 함은 동쪽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의 약칭이다.
또한 독로가 동네로, 다시 동래로 음전 되어 불렸다고도 한다.
동래에서 한자 '래(萊)'자가 경작하지 않은 거친 곳이라는 의미가 있어
'거칠 산' 지명의 '거칠다'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동래부지'(1740)에 동래부는 7개면(읍내면, 동면, 남촌면, 동평면, 사천면, 서면, 북면) 82리 19동의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이 중 읍내면을 중심으로 동면과 서면 일부가 현재의 동래구에 해당된다.
1910년 부산부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이 되었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1949년 부산시 동래출장소, 1957년 부산시 동래구가 되었다.
이어 1963년 부산직할시 동래구로 개편되었고, 1975년 관할구역 중 수영, 망미, 민락, 광안동이 남구로 옮겨왔고, 1980년 해운대 출장소가 동래구에서 분리되어 해운구로 승격되었다.
1988년 동래구의 북쪽지역이 금정구로, 1995년 남쪽지역이 연제구로 분리되었다.
현재 동래구는 14개 동, 면적 16.69㎢, 9만여 세대, 30만여 명이 고장의 역사와 전통을 가꾸어 가고 있다.
브랜드 슬로건으로는 '얼쑤 동래'를 정하여 부산의 뿌리인 동시에
비전인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동래구'의 이미지를 '동래학춤'의 시각적인 역동감과 청각적인 흥겨움의
추임새로 표현하고, 전통 문화 계승 및 정체성 확립과 신명나는 축제의 고장임을 나타내었다.
동래구 서쪽은 금정산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있고, 동쪽은 장산의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다.
수영강의 지류인 동래천(온천천)이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며 하천 연변의 침식 분지에 시가지가 발달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으로 열린 분지 지형을 이룬다.
동래의 중앙부에 위치한 마안산(대포산, 유방산으로도 불린다)은 2개의 종순형 산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탈면은 시가지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산명은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
동래의 진산인 윤산에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봉우리로 동래읍성의 주산에 해당한다.
수안동에는 과거 농주산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동래부읍지'(1832)에는 "농주산은 마안령에 이어 온 산으로 성비(城碑)가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풍수 형국에서 농주산은 마안산의 안산(案山)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칠산동에는 망월산이 있다.
동래읍성 동장대가 있는 산으로 마안산과 이어져있다.
마안산과 망월산 사이에는 인생문 고개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읍성 동장대를 따라 옛 북장대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동래읍성의 한 성터이다.
동래읍성의 입지는 풍수지리적인 사고를 틀로 하여 조성하였다.
살기 좋은 땅은 마을로 형성할만한 곳을 뜻한다.
농사지을 들판은 동래천 유역 일대로 물이 풍부하였다.
금정산에서 발원하는 범어천이 주류를 이루어 동래읍성을 휘감아 동래를 감싸 안고 수영강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보면 '긴 항아리 꼴을 이루어 가는 명당수(明堂水)' 이다.
동래는 조산의 흐름, 읍성의 형국, 풍부한 물 등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장풍득수를 이룬 명당이다.
동래읍성의 형태는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성곽으로,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산지와 평지를 절충한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의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암문-서문-남문-동문에 이르는 지역은 평지이고, 동문-인생문-북문-암문에 이르는 지역은
마안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읍성 둘레는 3090척(약1.0km), 높이는 13척(약 4m)으로 우물이 3개 있다.
1731년 정언섭 부사가 중축한 축성둘레는 1만 7291척(약 5.3km), 높이는 17척(약 5m)으로 우물이 10개 있었다.
인생문은 당시 성내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였으니, '죽은 자가 나가는 유일한 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이 문을 통해 피난을 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고 하여 '인생문'이라 했다고 한다.
동래읍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과 암문 그리고 간이문인 인생문 등 6개 성문이 있는데 관문은 남문이다.
동래 도래망의 형태는 동헌과 객사 중심으로 연결된 도로가 십자형으로 만들어져 객사, 동헌에서 남문과 서문과의 도로가 중심도로였다.
서문과 남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도로가 이어지고, 동문 주변의 마을과 동헌 중심의 마을은
논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여러 갈래의 골목길이 났다.
마안산의 좌우 능선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구가 있어 성내에는 물이 풍부하였다.
이 수구를 따라 양안에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이 골목길은 곡선형의 꼬부랑 미로길이다.
가다가 보면 기와집들, 돌담, 우물터, 당산나무 등이 이어지는데
대대로 살아온 향토적인 토속문화를 담은 골목길의 현장이다.
외부 도로는 양산과 밀양으로 가는 황산도(黃山道, 국도), 휴산역(대동병원 밑)에서 세병교로 지나 부산진으로 가는 도로, 이섭교를 지나 좌수영으로 가는 도로가 있었다.
동래읍성의 관아(官衙)는 충신당(忠信當) 동쪽에 수첩청, 수성창 등의 창고가 위치하였고, 서쪽으로 중군청, 장관청, 별무사청, 외군관청, 별기위청, 군뇌방, 지대고 등의 무청이 자리 잡았다.
남쪽에는 작청, 도훈도청, 서역청, 소동박, 교방, 공방, 주사, 형옥, 사령수직고 등의 문청이, 북쪽에는 객사, 관청, 접위청 등의 관사(官舍)가 위치하였다.
객사의 동쪽에는 군기고, 객사의 서쪽에는 별관, 사창, 대동고 등의 창고가 있었다.
객사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경계로 도로 왼쪽에는 군사와 관련된 무청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었으며,
동헌을 중심으로 이청(吏廳)이 도로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헌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북쪽에는 각종 창고의 기능과 주요 관사인 객사가 배치됐다.
이를 통해 볼 때 동래부 관아의 배치는 도로망을 경계로 기능분화가 명확하게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래읍성 내외 지역의 상징적 시설물로는 여단(재실) 사직단, 문묘, 성황당 등의 종교적 시설이 있었고, 학교시설로는 향교, 안락서원이 있었다.
송공단 정단 동북쪽 뒤편에 있는 '고관노철수·매동효충비(故官奴鐵壽邁同效忠碑)'엔 사연이 있다.
송상현 부사는 동래읍성을 지키다가 42세를 일기로 호상에 앉아 조금도 신기(神氣)가 변하지 않은 채 의연한 자세로 순국을 당하였다.
부하와 관노에게 남기는 말로 "내 허리 밑에 콩만한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이것을 표적으로 보고
내 시신을 거두어라"고 하였다.
모든 부민이 숨어서 도망을 가는데 철수와 매동은 끝까지 충렬공을 모시면서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마침내 능처럼 쌓인 시체 가운데 공(公)의 시신을 거두어 임시로 율림원(栗林原)에 묻어두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공의 동생 집에 가서 절의로 순국한 애국심을 상세히 말하였다.
동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절한 이야기를 듣고 율림원 묘를 청주 가포곡(加布谷)으로 반장(返葬·객사한 사람을
제 곳으로 옮겨다가 장사 함)하는데 힘쓴 관노들이었다.
송공단 담장 밖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단제를 지내는 날에 관노를 하여금 제사를 올리게 하고
제물은 동래부에서 마련하였다.
■ 온천천변의 환호마을
1890년대 동래읍성 남문 모습. 동래경찰서 뒷길과 동래시장 앞길이 충렬대로와 만나는 사거리에 있었다. 지금은 작은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
온천동 유적은 금정산 상계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평탄지(동래구 온천1동)를
환호(環濠·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도랑)가 감싸고 있다.
온천동 유적에서 약 2000여 년 전 삼한시대의 마을은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 잡아 농사를 짓고 살았다.
마을 구릉 아래는 온천천이 흘렀고, 구릉 정상부에서 이중으로 돌아간
이 도랑은 마을 등을 바깥 공간과 구분했다.
환호 안쪽은 마을 주민들이 모여 제사와 마을 회의를 하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환호는 마을 유지를 위한 방어기능, 의례장소, 상징적 경계 등의
성격을 가졌다.
사람들은 마을의 길흉을 다스리는 제사에 두형토기(제기)와
소형토기(접시, 시루 등의 그릇)를 사용하였다.
환호 바깥쪽 마을에는 족장집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집들, 창고, 가축우리 등이 모여 있었다.
마을의 앞과 옆에 있는 밭에서는 괭이, 따비, 쇠낫 등으로 작물을 재배하였다.
환호의 뒷쪽에는 이 마을의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온천동 유적의 의미는 부산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삼한시대 전기의 환호와 주거지가 확인되어
마을 구조, 주거, 방어시설, 일상 용기 등의 생활상을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동래온천 문화를 품은 동래온천장
'삼국유사'에 신라 682년(신문왕 2) 충원공이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전해진다.
고려 때 정포는 '2년 묵은 병이 반나절 목욕으로 다 나았다. 동래온천은 치료나 요양 효험이 매우 좋았다'고
소감을 남겼다.
'용재총화'에도 "지금 조선에는 6도마다 온정이 있는데 그 중 동래온천이 으뜸이며, 마치 비단결 같은 샘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데, 온천물을 끌어 올려 곡(斛,10말)에 다 받아둔다. 수온은 끓을 정도며 마시면 따끈하게 데운 술맛 같았다" 라고 적혀 있다.
'동국여지승람' 역시 계란이 익을 정도이며, 병자들이 줄을 지어 치료하고 사각에 돌이 깔려있고, 동(銅)으로
만든 기둥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병자들이 목욕을 하면 나아 신라시대에는 왕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온정개건비'를 보면 1691년에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지붕을 덮었으며, 1766년 강필리 부사가 낡은 건물을 개축하였다.
또 '봉산욕행록'은 1617년 정구가 한 달간의 동래온천을 끝내자 안색과 기혈이 전보다 훨씬 좋아져
보는 이들마다 동래온천의 효험이라 놀라워했다고 전한다.
1876년 개항이후 동래온천을 이용하는 일본인들이 늘게 되었고, 1883년 온천장에서
처음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1898년 1년간 25엔으로 동래온천을 10년간 부산거류민역소에 빌려주었다.
동래온천장은 일본인에게 관광 휴양지로 중요한 곳이었다.
1910년대에 일본인이 여관과 별장 등을 짓고 부산서 온천장까지 전차를 개통하여
근대적 온천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온천장 여관들도 홍보를 위해 전병, 도자기 등을 구워 손님께 제공하면서 성장을 지속해
1926년이 되면서 여관과 요정 등이 26개 정도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동래별장'은 1929년과 1935년에 일본 천황족이 묵을 만큼 유명세를 떨쳤다.
일제의 도시계획 실시에 따라 동래읍성이 철거되고 신작로가 개통되었다.
관아 건물과 문화재는 금강원 유원지로 이전했다.
동래를 지킨 동래읍성은 무너지고 온천장은 요정 등 향락 문화의 최고 유원지로 탄생하였다.
1908년에는 봉래관(현 호텔농심)이 개업하면서 일본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된다.
또한 2000여 평의 정원에는 큰 양어장도 만들어 투숙객에게 낚시터로 제공했다.
동래권번(券番)은 1910년 신분이 풀려난 동래부 관기들이 중심이 되어 집합한 동래기생조합이다.
1912년 동래예기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고 동래읍 교동에 자리 잡았다.
1937년 온천장 여관 업자들의 요청으로 온천장(동래구 온천동 210)으로 옮겼다.
1970년에는 동래 국악원이라 하였고, 그 이후 '동래국악진흥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동래권번 기생들은 어린 동기(童妓)들에게 가무를 가르치고, 가무를 연희자리에서 베푸는 일을 하였다.
주요 활동 무대는 동래온천장의 고급 요정이었다.
1930년대 기생 권번 제도는 일종의 기생조합으로 조합원이 요정으로 불려 가면 화대(花代·해웃값)로서, 처음 1시간당 1원50전, 이후 매 시간 1원씩으로 계산하였다.
요정에서 수수료 1할을 제한 후 권번에서 조합비의 명목으로 조금 공제한 나머지가 기생의 실수입이 되었다.
그 당시 쌀 한가마니 12원하던 때였으니, 기생들의 엄청난 수입도 가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광복 전후 20여 년을 통하여 기생들이 즐겨 부르던 '화류춘몽(花柳春夢)'에서 당시 기생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나 젊은 사람에게 사랑도 받았더란다/ 밤늦은 인력거에 취한 몸을 싣고/ 손수건 적신 적이 몇 번이던고/ 아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로다.'
당시의 기생의 일상생활은 호화로움 그 자체였다.
값진 옷에다 고급 화장품으로 얼굴을 다듬고, 서민들은 엄두도 못낼 인력거 또는
새로 등장한 택시에 혼자 몸을 싣고 다녔다.
1970년 동래국악원 때 약 100여명의 기생들이 온천장 요정에 출입하였다.
동래권번 기생들은 요정에서 관광객들의 여흥을 돋우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
악기연주 등을 통해 근대 대중예술의 한 축을 담당한 조선관광의 주요 자원이었다.
주영택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
※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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