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와 청룡등의 독룡
혜통국사 독룡 퇴치 위해 산기슭 헐어
신라시대 혜통 국사가 독룡을 퇴치하기 위해 왔다는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한 장안사 전경. 왼쪽 전각이 지난 5월 보물 1771호로 지정된 대웅전이다 |
- 장소: 기장군 장안읍
- 두 개의 계곡이 하나로 합쳐져
- 쌍계사가 장안사로 개명돼
- 밀려드는 손님 대접 어려워
- 청룡등 남은 끝자락 자르니
- 시뻘건 피 나오고 발길 줄어
신라시대 효소왕(재위 692~702년) 때 불광산에 숨어 있던 독룡이 곰으로 변해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당시 혜통 국사(惠通國師)는 친히 독룡을 퇴치하기 위해
불광산 장안사(長安寺·기장군 장안읍 장안로 482)에 왔다.
혜통 국사는 독룡이 청룡등(靑龍嶝)에 숨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밀법(呪密法)을 사용해 독룡을 말로 타일렀다.
그러면서 독룡이 다치지 않고 도망갈 수 있도록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 주었다.
하지만 독룡은 또다시 불광산의 한 바위굴에 곰으로 변해 숨었다.
이에 혜통 국사는 곰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받게 하여
웅신(熊神)의 해독을 끊었다고 한다.
혜통 국사가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버리자 기존의 두 갈래 계곡이 하나의 계곡으로 변했다.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 원효 대사에 의해 창건된 쌍계사는 이로 인해 장안사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여기에 독룡의 피해까지 벗어나게 되자 동해 용왕의 가호를 받아 번성의 일로에 들어섰다.
이후 신라 애장왕(재위 800~809년)이 신하들과 다녀간 이후 장안사는 사세(寺勢)가 흥기하여
전국에서 일 년 내내 많은 보살들이 밀려들었다.
이에 주지는 절을 찾는 손님들의 접대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던 나머지
보살들이 적게 찾아오게 하는 방도는 없을까 고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어느 날 늙은 과객이 장안사를 찾았다.
외형은 비루했지만 눈빛이 비범해보여 주지는 노과객에게 현재 처한 장안사의 처지를 설명하고 방도를 물었다. 노과객은 주지에게 소원이라면 일러주겠으나 후회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은 뒤
"절 앞을 감돌아 흐르는 냇물을 똑바로 흐르게 하면 된다. 즉 청룡등의 남은 끝자락을 잘라버리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들은 주지는 즉시 노과객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파헤친 능선 끝자락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 나오고 황금송아지 한 마리가 뛰쳐나와
슬픈 울부짖음을 세 번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후부터 장안사에는 찾아오는 보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장안사를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실은 원효의 정토신앙이 이 지역까지 전파되어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이후 장안사에는 토속 신앙과 결합된 밀교가 한때 성행했다.
혜통 국사의 혜통밀교의 주기능은 병을 고치는데 주안점을 두어 제병밀교(除病密敎)로 알려져
이 지역 불교의 특색으로 한때 자리를 잡기도 했다.
혜통 국사가 독룡을 천도하여 곰으로 바꾼 항룡사상도 밀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장안사는 1657년(효종 8년) 원정(元正)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양식인 대웅전 지붕 밑에서
2009년 중수 연도가 적힌 상량문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범어사 대웅전보다 20년 정도 앞선 것이 확인된 셈이다.
상량문에는 건물을 지은 연도부터 시주를 한 사람 이름까지 좁은 나무기둥에 1200여 자가 빼곡히 적혀 있다.
7m가 넘는 높은 천장과 해안 특유의 경사가 심한 지붕과 건축사적이나 학술적으로 독특해
명작으로 꼽혀 대웅전은 지난 5월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됐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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