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동백 진 자리에 봄이 온다
전장 뜨거웠던 피로 평화의 꽃 피우고
100년 폐쇄된 땅 열려 도심 숨통 틔우니
부산의 봄이 더 깊고 푸르구나
UN기념공원 '무명용사의 길'. 11개의 물계단과 11개의 분수대, 11그루 소나무가 늘어서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평화공원에 닿는다. |
봄이 오는 곳에는 언제나 동백이 먼저 핀다.
겨우내 추위를 뚫고서 진홍빛 꽃잎을 터뜨린다.
기나긴 인고(忍苦)의 세월에 대한 응어리가 분출한 듯 붉디붉은 꽃송이는 소리 높여 봄을 알린다.
봄 맞을 채비가 되지 않은 세상에 전령 역할을 다한 다음, 동백은 불현듯 모가지를 꺾어 봉오리째 툭툭 떨어진다. 꽃송이가, 제 나무 바로 아래에 떨어진 그 꽃 한 송이가 땅에서 다시 피어난다.
싱싱한 초록 잎이 흘린 선혈 같은 꽃송이가 시들어 땅 밑으로 다시 스며든다.
그 의연한 핏자국으로 인해 언 땅은 서서히 녹는다.
추위가 채 가시기 전이지만, 공원에 나온 사람들 옷차림과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부산의 대표 공원인 'UN기념공원'과 '부산시민공원'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럼에도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땅에는
피땀 흘린 젊은 군인들의 모습이 동백꽃송이처럼 어리어 있다.
떨어져 누운 수많은 붉은 봉오리들로 인해 '오늘의 봄'이 어김없이 우리 앞에 찾아왔다.
■ 평화의 꽃 피우는 UN기념공원
UN기념공원 정문(왼쪽)과 추모관. |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전몰장병이 고이 잠들어 있는 곳, UN기념공원.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에는 해마다 관련 국가의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참전 용사의 남은 가족에게 이곳은 거룩한 성지며, 운명적 기억의 땅이다.
2300여 개 붉은 꽃송이 위에는 지워지지 않는 돌 명패와 사각으로 전지된
관목이 도열해 있고, 국가별로 나뉜 묘역 곳곳에는 기념 상징물이 세워져
있다.
'추모명비'에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4만여 명 유엔군 장병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다.
검은 돌벽과 반투명 유리가 서로 엇갈린 원형으로 만나고, 그 가운데는 분수가 있는 수공간을 두었다.
또한 '유엔군 위령탑' 벽면에는 나라별 전투지원 내역과 전사자 숫자가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 내부로 들어가면 안장자들과 관련한 사진 및 자료를 전시해 두었다.
위령탑의 동쪽 방향으로 11개의 물계단과 11개의 분수대, 11그루 소나무가 늘어선 '무명용사의 길'도 있다.
그 길을 따라 보이는 인근 '평화공원'에 높이 15.5m의 '유엔군 기념물'이 최근 세워졌다.
인근 평화공원에 세워진 높이 15.5m의 '유엔군 기념물'. |
묘역을 둘러싼 길과 주변으로는 갖가지 나목이 오랜 기간
가지런히 잘 가꾸어져 있다.
동백나무와 소나무 등 3만여 그루의 수목 그리고 잔디광장과 수경시설 등
그야말로 잠잠히 걷기에 좋은 도심지 공원이다.
가장 일찍 개화하는 홍매화 한그루는 많은 포토그래퍼에게 출사의
유혹을 준다.
그리고 벚꽃 필 시절에, 이곳을 놓치면 안된다.
바람에 흩날리어 잔디 위에 눈처럼 소복이 쌓인 양태는
여느 수묵담채화 못지않다.
장관의 결정판은 단연 왕벚꽃이다.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겹벚꽃잎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공원에서 빠뜨리지 말고 보고 가야 할 시설은 '추모관'과 '정문'이다.
두 건조물 모두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 김중업의 작품이다.
장소가 가진 상징성을 기하학적 삼각 모양 건물로 해석한 추모관은 작은 예배당 형식으로 지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천장부로 모이는 선의 흐름은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디자인 장치이다.
무엇보다도 전통 건축의 지붕선과 배흘림기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정문의 조형미는 탁월하다.
흰색 콘크리트는 목재의 결이나 백자의 결이 녹아 있으면서도, 전통에 매여 있지 않고 자유분방하다.
현대와 미래, 동양과 서양의 모든 영역에 열린 문으로서 기능을 다 하고 있다.
부산시민공원 내 옛 미군 초소와 막사. |
■ 생명의 호흡 시작한 부산시민공원
미군 부대 '하야리아(Camp Hialeah)'로 오랫동안 불리던 땅, 부산시민공원.
도심 내 공원 면적의 절대 부족이라는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한 곳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에 이 땅은 정체성을 잃은 채, 아픔의 날들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마장과 병참기지, 군사훈련소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방과 함께 미군 주둔기지로
활용되었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전쟁이 끝났음에도 인간이 만든 역사의 울타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2014년 5월 1일.
100년 만에 시민에게 돌아온 땅은 그제서야 겨우 막힌 숨을 몰아 내쉬었다.
동토에 온기가 고루 퍼져 혈색이 완연히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많이 기다려 주어야 한다.
공원 조성을 위해 오랜 기간 준비과정이 있기는 하였으나, 아직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겨우겨우 호흡을 가다듬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반기고 환영해야 할 일은 그 넓은 땅 전체가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되돌아 왔다는 사실 그 자체다.
같이 살아가며 애정을 기울여 생명력이 도시의 진정한 허파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감성발달 그루터기(숲 속의 나무를 모티브로 한 유아놀이 시설), 돔플레이(정글짐과 그물망의 조합형 놀이기구), 에어바운스(붕붕 뛰어오르는), 서클타워(3개층 높이의 미끄럼틀) 등 어린이놀이시설은 진작부터 많은 아이와
즐거운 호흡을 나누고 있다.
더불어 도심 백사장이나 미로정원, 몰놀이마당, 뽀로로도서관 등도 아이들에게는 인기 만점이다.
초대형 잔디광장에서는 시민을 위한 큰 행사가 벌써 몇 차례 치러졌고, '다솜관'과 '시민사랑채'에서는
다양한 전시행사도 열렸다.
플라타너스 90여 그루를 모아 놓은 '기억의 숲'. |
16만5000평에 달하는 거대 공원을 채울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문화행사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더욱 중요한 책무는
장소의 결이 살아 있는 공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이 공원의 존재가치이며, 차별화 전략이기도 하다.
현재 그나마 옛 미군 부대였던 시절의 담벼락과 막사, 망루, 하사관 숙소
등의 기억의 흔적이 이럭저럭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낡은 목재 전신주를 재활용해 꾸민
'기억의 기둥'과 플라타너스 90여 그루를 모아 놓은 '기억의 숲'이다.
사령관 관사를 리모델링한 '숲 속 북카페' 역시 내부에서 느껴지는
시간성으로 인해 정겨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물과 나무로 꾸며진 산책로는 발길 닿는 대로 어느 길을 선택하든 괜찮다.
길을 걷다 만나는 벤치에서 잠깐 먼 창공을 보는 것도 행복한 여유다.
그런데 밤이 되면 달빛 아래 경관 조명과 더불어 낭만적인 공간으로 한 번 더 변신한다.
나무도, 물도, 길도 은은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어 데이트하는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 부산의 공원은 아주 깊다
부산의 공원은 그냥 식재만 무성한 그런 일반적 공원이 아니다.
시간의 겹이 많이 응축되어 있는 만큼 땅의 깊이가 두텁다.
무시하거나 뭉개는 것으로 엄연한 과거가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끌어안아서 제 과거를 스스로 용서하고, 자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지 그리움의 대상만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겨 기억하고, 추모하고, 다독여야 한다.
고스란히 제 발치에 드러누운 붉은 꽃송이처럼 땅의 양분이 되어 주어야 한다.
넓고 깊은 공원에서는 누구든 마음이 고와지고 노근노근 부드러워질 것이다.
사색하게 되고, 서로 배려하게 되고, 몸과 정신이 힐링될 것이다.
가족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며, 하늘과 땅에도 찬사를 보낼 것이다.
팍팍한 도시 속 가까이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다시 봄이 온다.
이번 봄에는 깊은 공원을 거닐어보자.
동명대 실내건축학과 교수 yein1@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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