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관페리'
다시 열린 한·일 뱃길, 일본의 재상륙을 許하다
일본 수학여행단이 부산에 도착하자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제공 |
지난밤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난 '페리 관부(關釜)'가 부산항에 들어왔다.
승객 234명과 자동차 30대를 싣고 온 '카-페리' 즉, 자동차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여객선이었다.
때마침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7일)가 개통한 시기여서, 이 여객선은 일본 도쿄와 한국 서울을 곧장 잇는
'바다의 하이웨이'로도 불렸다.
해방과 함께 사라진 관부연락선의 부활이었다.
공동 운영하는 선박이었다.
기업 차원에서는 적자운영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진단이 이미 나온 바 있었지만, 사업계획에서부터
국가가 적극 개입하면서 운영을 시작하였다.
부관페리의 운항이 1967년 제1차 한일경제각료회의(도쿄), 1968년 제2차 회의(서울)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더욱이 6월 17일 부관페리 취항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발을 디딘
첫 일본 승객은 일본의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
기시가 누구인가.
기시는 일제의 만주 경영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군-재계-관계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인물이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페리 취항식에 참석한 백선엽 교통부장관은 만주군 장교 출신이며, 박정희 대통령 역시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
이 인연일지 모르나, 기시는 취항식을 마치고 다음날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부터 1등 수교훈장을 받았다.
또 페리 운항을 준비하던 관계 부처 실무자들은 1970년 3월 오사카 엑스포로 몰려드는
일본인과 외국인을 한국으로 유치할 목적으로, 그들이 탄 승용차까지 함께 들여오는 실용적인 고민도 했다.
'국가의 보안'을 위한 조치였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이 재일교포인 탓이었다.
더욱이 승용차가 일본에서 들어오면 무기를 숨기고 올지, 한국 내에서 어디로 돌아다닐지,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한국의 관문을 출입하는 부관페리가 한국을 보호하는 안보제일주의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조치로 부관페리는 적자를 면치 못하였다.
한국 국적의 부관페리로 만들었다.
이때에도 '국적선 부관페리호'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경제적 이익보다
국위선양이 우선한다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였다.
부관페리는 오늘도 운항 중이다. 사진은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빠져나오고 있는 부관페리의 모습. |
안테나 없이도 일본 방송을 무상으로 볼 수 있었다.
일본 야구를 즐기고, 일본 드라마를 보고, 일본 음악을 듣고,
일본 광고를 보았다.
서울의 방송국 PD는 잘나가는 일본방송을 살피기 위해
부산으로 출장을 오곤 하였다.
이런 부산에 부관페리가 다시 등장하였다.
부관페리가 운항하자 일본의 수학여행단이 수백 혹은 수천 명씩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일제시기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학생들이 조선으로 수학여행을 오던 것과 똑같다.
부관페리를 타고 일본 수학여행단이 부산에 내리는 이유는 옛 일본의 영광을 찾아보는 것에 있었지만,
무엇보다 싼 여행 경비도 한 몫을 하였다.
관광수익을 올리는 차원에서, 제복입은 학생들이 페리터미널에 내리면 이들을 위한
대대적인 환영식이 열리기도 하였다.
1970년대 소위 '기생관광'이란 단어는 유행어가 되었다.
부산과 서울에는 일본인의 현지처가 많다는 말도 나돌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일본인 관광객의 남녀비율이 90 대 10 정도였다는 것은 기생관광의 실태를 반영한다.
이때 일본인 관광객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하치쥬도루'라는 은어가 생겨났다.
일본인 관광객이 한국 여성에게 지불한 화대가 '하치쥬도루' 즉 80달러였다.
주말이면 부산 시내의 호텔에는 일본 남성들이 그룹을 지어 투숙하고, 호텔 내 가라오케에서
한국 여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일본 가요를 불렀다. 그러고는 다음 주말을 또 기약하였다.
부산 시내 중심가의 한 다방에는 일본인을 접대하기 위한 여성 종업원이 20명씩이나 진을 치고 있었다.
저급, 저렴한 관광객이 부산을 돌아다녔던 한 시대의 단면이었다.
소위 '코끼리밥통 사건'이 상징하는 일제 물품의 반입은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경제발달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1983년 1월 부산의 어느 여성단체에서 일본을 갔다가 페리를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에서 출국소속을 받았다.
이들이 코끼리밥통(일본 Z전자회사 제품)을 몇 개씩 사들고 온 것을 가지고, '쇼핑관광'이라고
언론에서 소란을 떨었다.
망국병이라고 조롱을 보냈고 국회에서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급기야 정부가 나서 국내 밥통 생산업체 관계자를 모두 소집했다.
좋은 물품을 만들라는 압력이었다.
국내 산업발달의 추동력이 부관페리였던 것일까?
수입다변화품목에 묶여 제대로 구할 수 없었던 카메라, 워크맨 등 갖가지 일제 물품이 보따리 장수의 능력(?)에 따라 깡통시장에 즐비하게 깔렸다.
이들 물품은 인근 운송회사를 통해 빠르게 서울로 배달되었다.
1976년 부산시와 시모노세키시가 맺은 자매결연 증서만이 오랜 관계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부관페리가 다시 부흥하여 부산항에 따뜻한 봄을 실어다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 백명 보따리 장수들의 물건을 실은 택시들이 여객터미널을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세관 직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도 부족하면 페리 탑승객에게 동반 운송을 넌지시 부탁했다.
방금 국제시장에서 구입한 고추장과 된장, 라면과 소주를 내일이면 일본에서 팔고, 최신 일본 물품을 가져다가 다음날 부산에 와서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에서 유통시켰다.
아무리 빠른 비행기라도 이 속도를 쉽게 따라잡지는 못하였다.
보따리 장수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이 들썩이고,
부산항도 덩달아 활기를 띠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재일교포들이 페리 안에서 숙식을 다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바다를 떠도는 생활을 택하였다. 보따리 사업이 성행하자 한국인 아줌마 '내국 보따리'도 생겼다.
더 이상 팔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일제 물품은 너무 흔해졌고, 한국 제품에 대한 호응도가 너무 높아졌다.
하루에 한번 부관페리가 출발하는 국제여객터미널은 더 이상 북적이지 않는다.
이들이 사라진 부관페리는 빛을 잃고 있다.
부산항마저 조용하다.
※공동기획: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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