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의 푸른 '이끼'
옛 城은 말한다, 다시는 치욕의 역사 되풀이 말라고
- 1592년 임진왜란 아수라장 속
- 적과 싸우다 스러져간 민관군
- 선조들의 피눈물 서려 있는 곳
- 1910년 국권을 빼앗아간 일제
- 성 허물고 일본인에 땅 팔아 넘겨
- 해방 후엔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
- 새 돌을 쌓고 성을 복원한다는 것
- 뼈아픈 과거를 잊지 말자 함이요
- 그런 수난을 당하지 말자 함이라
■ 참상
1731년(영조7) 정월.
추위에 입김을 호호 내뿜으며 동래읍성 남문터에서 성터 기초공사를 하던 동래부의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일부 주민은 바닥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축성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동래부사 정언
섭(鄭彦燮·1686~1748)이 다가왔다.
-부사 나리, 땅에서 나온 유골이 여럿입니다요.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경거망동 할 거 없다. 유골이 나온 것은 연유가 있을 것인즉 연유를 밝혀 처리하면 될 터이다.
-오래 전에 이 자리에서 전란이 있었다 들었사온데 오늘에야 두 눈으로 확인하니 괴이하고
슬픈 한편 분함도 억누를 수 없습니다요.
-나도 전란에 대해 들었고 사초에서도 보았느니라. 오늘 성을 수축하는 것은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함이요 다시는 그런 치욕을 당하기 않고자 함이니라.
그렇게 말해놓고 정언섭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드러난 유골 중에는 백골이 다수였고 그 사이 사이에 포환과 화살촉, 창과 칼 등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약 140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잔인한 왜란의 상흔이 분명했다.
사초에 전해져온 것보다 실상은 더 참혹했다.
확인된 인골 중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은 12명이었다.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2005년 6월 초여름.
부산도시철도 3호선 수안역 공사 현장에서 발굴조사를 하던
경남문화재연구원 직원들은 바닥에 드러난 참상을 보고 눈을 바로 뜨지 못했다.
수많은 유골과 함께 칼, 화살촉, 창날, 깍지, 찰갑, 투구 같은 전쟁용구가 어지럽게 뒤엉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나무 막대기를 뾰족하게 깎아 바닥에 거꾸로 꽂은 목익도 무더기로 나왔다.
이곳이 동래성의 해자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출토 인골들은 죽은 뒤에 해자로 유기됐을 것으로 분석됐다.
인골 옆에 나뒹군 투구 안에는 '동래진(東萊鎭)'이란 명문이 드러났다.
죽어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지킨 동래부의 병사였다.
싸우다 죽은 조선인이 어림잡아 5000명에 달했다.
성주(송상현 동래부사)가 장렬히 전사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병사와 부민, 노비, 첩, 기생 등이 함께 죽었다.
죽은 이들은 집단적으로 해자에 던져졌는데, 그 참상이 400여 년만에 드러난 것이다.
발굴팀은 조상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데 숙연해져 발굴 작업을 중단하고 진혼제를 가져야 했다.
아마 270여년 전 정언섭 동래부사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 축성비에 담긴 뜻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내주축성비.현재 동래읍성 북문 앞에 있다. 문화재청 제공 |
1730년(영조 6) 8월, 정언섭은 동래부사로 부임하자마자
동래읍성 수축의 타당성을 검토했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공사 계획을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이인좌의 난(1728년)을 겪은 터라 왕권강화 차원에서
주요 군현의 읍성 정비를 독려하고 있었다.
1731년 1월3일 성기(城基) 측량을 필두로 공사가 시작됐다.
성곽은 동소, 서소, 남소, 북소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축조됐다.
공역에는 많은 백성과 승려들이 동원됐다.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4월에는 성곽, 5월에는 성문, 7월에는 문루(門樓)가 완성되었다.
성돌은 가급적 새 것을 구해 쓰도록 했다.
이렇게 수축한 동래읍성은 둘레가 2280보(步)로 약 8리(里)에 달했다.
축성역에는 경상도 64개 군에서 5만200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쌀 4500섬, 베 1550필,
그리고 1만3400냥의 자금이 소요됐다.
성의 유지관리를 위해 조미(粗米) 4000여 섬을 비축해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 200명을 뽑아 부역을 덜어주고 성을 지키게 했다.
8월에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과 좌병사 이복휴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이 열렸다.
완성된 읍성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각 하나씩을 내었고 암문과 인생문을 따로 두었다.
인생문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빠져나간 사람이 대부분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지라 보는 느낌이 특별했다.
동서남북 요처에 들어선 장대(將臺)는 장수의 늠름한 투구를 연상케 했다.
읍성의 동헌을 중심으로 망월산에 동장대, 마안산에 북장대, 향교 뒤쪽 복호산에 서장대, 남문 근처에 남장대를 각각 세웠는데, 이로써 사각지대 없이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야가 가능했다.
확장된 읍성은 평지와 산성을 낀 평산성(平山城)으로 둘레가 약 3.8㎞, 높이가 약 4m에 달했다.
읍성 내의 건물은 종류만 155개에 달할 정도로 다양했다.(1740년 간행 '동래부지' 기록)
동래읍성이 언제 처음 축조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성곽조에는 1387년(고려 우왕 13) 박위 장군이
왜구 방어책으로 개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읍성의 둘레는 3090자(약900m), 높이 13척(약 4m)에 이르렀고 우물이 6개 존재했다고 한다.
읍성 수축이 일단락된 1735년(영조 11), 동래부사 최명상은 그간의 축성 과정을 자세히 담은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6호)를 세웠다.
부사의 명에 따라 축성비는 특별하게 제작됐다.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리고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조각했다.
받침돌 윗면에는 도드라진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비신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새기고, 뒷면에는 동원된 주민과 승군,
소요된 재원(전, 포, 미곡), 그리고 수축 종사자의 명단을 적었다.
내주축성비는 본래 남문 밖 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에 세워진 것을 1765년 옮겨 세웠고 1820년 다시 남
문 자리에 두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금강공원으로 옮겼고, 지금은 동래읍성 북문 앞에 갖다 세웠다.
전체가 하나의 울을 이루는 튼튼한 성곽과 다양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가득 차 있던 18~19세기는
사실상 동래부의 최대 황금기요 전성기였다.
■ 정현덕 부사의 눈물
1890년대 동래읍성 남문 모습. |
방비를 세운 탓인지 조선 후기 한동안은 외침이 없었다.
유비무환이랄까. 읍성을 단단하게 수축해 놓고 한번 써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건 읍성을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다행한 일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읍성에는 이끼가 끼었고 일부는 제 무게에 못이겨
무너져 내렸다.
19세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로 조선의 바다에도 격랑이 일고
있었다.
대원군은 해양을 통한 외세의 침략을 우려하여 동래부를 방어거점으로 잡고 동래읍성 개축을 주문했다.
정현덕(1810∼1883)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항왜의식이 투철했다.
그는 1867년(고종 4) 대원군이 집권하자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일본 명치 신정부가 정한론을 업고
조선을 기웃거리자 군사적 대응에 부심했다.
일본 측이 초량왜관을 침략의 교두보로 만들 의도로 형식에 맞지 않는 서계(書契, 외교 문서) 접수를 요구하자
정 부사는 강단있게 맞서며 국권을 지켰다.
1871년(고종 8) 그가 주도한 동래읍성 개축은 열강에 대한 상징적 군사행위였다.
이때 새로 짓고 수리한 것이 30개소의 치(雉), 6문의 방어시설 그리고 동헌 객사 등 84건에 이르렀다.
읍성을 개축하면서도 정 부사의 고민은 부산 앞바다에 닿아 있었다.
누르면 튀어오르는 용수철처럼, 어떤 누구도 일본의 기세를 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동래부에서 서계 접수를 계속 거부하고 강경 일변도로 나오자 1872년 1월 일본은 부산항에 철제 기선
만주환(滿珠丸)을 몰고 들어와 요란한 기적시위를 벌였다.
그해 9월에는 일본 해군을 실은 군함이 위력 시위를 강행했고, 급기야 일본 외무성은 초량왜관을 전격 접수했다.
무력 시위에 놀란 동래부는 고작 어선 몇 척을 띄워 대응하는 수준이었다.
초량왜관에 와 있던 일본 외무성 직원이 자국에 보낸 정탐 보고서를 보면, 동래부의 군세를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으로 평가했다.
'…타고 있는 배는 어선에 지나지 않고 병사들은 농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승병이 가담했는데 무기는 창칼과 활이고 지휘자 격인 사람만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실상이 그러했다.
속이 탄 정 부사는 1873년 대포 3문을 주조하고 동래성 안에서 발사시험을 했다.
하지만 그 대포는 발사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난다.
실패였다.
이 사실도 일본 외무성 직원이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동래읍성을 개축하는 등 열세에 몰린 군사력을 어떻게든 키우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일본의 신무기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꽝!"
1874년 3월18일 영도 앞바다에서 화약폭발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진상이 드러나지 않은 사건이지만, 일본 외무성에 보고된 내용은 꽤 구체적이다.
개요는 이렇다.
초량왜관과 그리 멀지 않은 영도 봉래동 바닷가에서 폭발음이 난 것은 밤 11시쯤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튿날 정황을 살피니 조선의 배 2척이 침몰해 있고 조선인 12명이 시체로 변해 있었다.
전후 사정을 조사하니, 왜관에서 일본어 통역 일을 해오던 배통사(陪通事) 최재수가
일본인에게 밀무역을 부탁하고 일본에서 화약을 싣고 들어와 비가 오는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어
조선 배에 옮겨 싣던 중 폭발사고가 났다는 것.
당시 화약은 금수품으로 밀무역이 아니고는 들여올 수가 없었다.
보고서에 나타나는 통역들의 이름이 정확하고, 이들이 동래부사의 지휘를 받는
훈도 밑에 있는 직원이란 사실은 사건의 신빙성을 높인다.(최해군 '부산 이야기 62마당' 참고)
종합해보면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화약을 밀수입하다 폭발사고가 났고,
그 사실을 저들의 정탐이 미주알고주알 보고한 것이다.
약소국이 겪은 설움이다.
당시 군사적 방비의 상징인 동래읍성은 이같은 역사적 비애를 알고나 있을까.
■ 복원 그리고 성벽의 밀어
도시철도 3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나온 임진왜란 당시 갑옷과 화살촉 등 무기류. |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25년 맨 먼저 동래읍성과
읍성 내 관아부터 철거하기 시작한다.
민족주권의 부활을 막고 독립의지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읍성을 없애고 얻어진 땅을 본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의 적산가옥이 마구잡이로 처리되면서
가까스로 남은 건 동헌 건물과 산지의 일부 성벽뿐이었다.
읍성 복원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79년부터였다.
부산시와 동래구가 정비계획을 세워 산지쪽에 형성된 읍성 1962m 중
지금까지 향교~북문 일원의 900m를 복원했다.
일제 강점기때 시가지 정비 명목으로 쫓겨났던 내주축성비와 망미루, 독진대아문 등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동래구는 고도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비록 늦었지만 한발 두발 뚜벅뚜벅 걸어가 달빛에 젖은 신화같은 역사를 꺼집어 내 햇볕에 말릴 일이다.
정언섭 부사가 새긴 축성의 뜻과 정현덕 부사의 비원을 잊어선 안 된다.
2015년 6월, 서장대에서 북장대로 오르는 성밖 길.
이끼 낀 검푸른 돌들이 성벽 아랫도리를 떠받히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석들이 얹혀 있다.
밑돌 없이 윗돌이 놓일 수 없고, 윗돌 없이 밑돌이 제역할을 할 수 없는 법. 옛 돌과 새 돌들이 서로 엉기어
다시 백년을 버티자고 맹약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어쩐지 엉성하고 불안하다.
성 안길을 걸어도, 성 밖길을 걸어도 성벽이 주는 보호감이나 안정감이 없다.
성이 제 기능을 잃고 유물이 되었음이다.
성벽에 손을 대 본다.
이끼가 잔뜩 낀 천금같은 막돌.
돌의 이마가 서늘하다.
막돌에 실린 시간이 역사 저편으로 빠져나간다.
성벽에 귀를 대 본다.
옛돌과 새돌이 서로 대화한다.
-1592년 임진년의 저 참혹한 아수라를 잊어선 안돼.
그때 왜 우리가 무방비로 당했는지 돌이켜봐야 해.
18세기의 수축 사업, 19세기 개축 사업은 자원이 남아 한 게 아니야.
저 속에 동래의 피눈물이 스며 있는 걸. 전통을 지킨다는 건 결국 우리의 정신과 혼을 지키는 일이야.
-그려. 옛 돌 위에 새 돌을 쌓아 복원하는 뜻이 중요해.
우리가 당한 과거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결의, 내일을 지킨다는 의지가 중요한 게지.
부산 고도심의 상징인 동래읍성이 복원된다면 그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어.
그땐 세계인들이 신기해서 찾아들 테고 부산이 세계중심이 되는 거지.
동래읍성은 어제를 불러와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역사는 말을 시키는 자에게 장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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