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체성을 둘러싼 흔적 투쟁의 근원: 부마항쟁
철권통치 걷어찬 도시대중의 저항…1979년 '10월의 축제'를 기억하라
옛 부산시청 앞을 계엄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지키고 있다. |
1979년 10월 16일 오후 2시 전국에서 가장 시위할 줄 모르는 유신대학이라고 놀림 받던
부산대학교 학생 2500명가량이 부산 중구 부영극장 앞에서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배포한 선언문에서 유신헌법 철폐, 안정성장과 공평한 소득분배, 학원사찰 중지, 학도호국단 폐지, 언론·집회·결사의 완전한 보장, YH사건과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전국민에 대한 정치적 사찰과 보복의 중지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3시30분께 새부산예식장 앞, 4~5시께에는 용두산공원, 제1대청파출소, 창신동 국민은행 앞,
부영극장 앞, 동아데파트 앞, 부산우체국 앞에서 시위를 계속했고 5시40분께에는 언론사 취재차량이
처음 공격대상이 되었다.
야간에 이르자 시위대는 5만 명으로 늘어났고 다양한 구성원 즉 화이트 컬러, 노동자, 상인, 고교생같은
도시대중이 대거 동참했다.
18일에는 시위가 마산으로 확산되어 경남대 학생들을 비롯한 같은 성격의 구성원들이 민주회복,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두 도시의 공식연행자만 1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1979년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전개된 부마항쟁은 처음에는 학생들이 주도했으나
점차 도시대중이 시위를 주도하는 양상을 띠면서 단순한 민주화운동을 넘어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은 사회운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건의 진상은 은폐되고 망각된 채로 그저 부마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다.
부마항쟁이 수많은 인권 침해에 대한 보상은커녕, 진실조차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부마항쟁이 극복하고자 했던 유신세력이 여전히 끈질긴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 유신은 극복되지 않았다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에 의해 불 탄 마산 산호파출소. |
부마항쟁은 5·16쿠데타 이후 긴급조치와 계엄령을 반복하며
강고한 철권통치를 과시하던 권력 집단 내부에 갈등을 초래하여
10·26 사건을 시발점으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 종언에 불과했고
이어진 12·12 및 5·17 쿠데타에서 보여주듯 유신체제 종말이 아니었다.
유신체제는 반복되었다.
그것도 헤겔의 말처럼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전두환 시대가 비극이라면 지금은 희극의 시기일 것이다.
재림한 유신시대에 부마항쟁 이후 전개된 역사를 짚어 보려면
비극보다 더 슬픈 희극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요청한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 권력의 담당자나 수혜자들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일격이었다.
이에 그들은 권력 유지에 위험요소로 떠오른 부산시민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압박과 회유의
이중 전략을 구사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첫째는, 압박 차원에서 부산에 근거지를 둔 기업들을 해체해 경제적 위기감을 조성했다.
1980년 신군부가 동명목재상사 강제해산과 재산 몰수에 이어
1985년 당시 재계 6위이던 국제상사 그룹을 공중분해하자
시민은 부산경제의 몰락이란 공포감을 넘어 당면한 생존에 위기감을 느꼈다.
집권세력은 정치적 도전보다는 권력에 순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의식의 자각을 견제하고 순응주의로 내몰았다.
부마항쟁 직후 계엄사가 신문에 실리는 사진의 크기까지 지침을 내려 통제한 흔적을 보여주는 증거물. |
둘째는 회유 차원에서 권력의 분점과 보수화를 관철했다.
이들은 부산시민을 보수화 시키고자, 그전과는 달리
부산경남 출신들에게 파격적인 권력 분점을 허용했다.
지역의 대표 정치인 YS를 회유하여 권력의 중심부로 끌어들이고
언론을 장악하여 지역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위축시키며
시민의 비판정신을 마비시켰다.
심지어 부산경남권력이라는 말이 언론에 회자되도록 조장하여
부산시민에게 허구의 자존심과 권력의 꿀맛으로 유혹했다.
그 결과 부산은 보수정치의 본산인
대구의 정치적 위성도시로 '학실히' 편입되었다.
셋째는 권력 장악 구도의 종결판인 지역주의 프레임의 강화이다.
이들은 지역주의의 덫으로 부산시민과 마산시민을 포획했다.
곧 지역주의로 국가를 분할해 경상도 지역주의 패권을 강화했다.
3당 합당은 지역주의 프레임을 극도로 강화시켰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초원복국집 사건과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에서 보듯 지역패권주의는 영남의 타고난 '생래반점'으로 등극했다.
부산시민은 이 구호에 강렬한 귀속감과 쾌감을 느꼈고, 그 결과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호남의 지역 단위 사건으로 폐쇄시키고 부마항쟁은 기억조차 불확실하게 되었다.
■ 젊은 도시대중의 축제적 저항
서구 동대신동 동아대 캠퍼스 정문을 계엄군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
그럼에도 부마항쟁은 살아 남았다.
부마항쟁에서 놀라운 사실은 시위 참여자들의 전투성과 폭력성이다.
권력이 자행하는 폭압에 맞서 젊은 도시 대중이 일어난 것은,
서구역사에서 공동체의 위기를 절감하고 소란과 조롱과 폭력으로 저항했던 샤리바리(charivari) 축제를 상기시킨다.
부마항쟁은 해양도시 부산 시민의 개방성이 폭발적으로 과시된 축제였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현상 또는 민주화 운동이나 민중운동이라는
이름만으로 수렴해 정리할 수 없는 도시민의 이질성과 복합성을 드러내는 도시소요의 성격을 가졌고, 그 투쟁 대상도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장치와, 권력과 결탁한 세력에 대한 공개적 저항이었다.
이 점에서 당시의 학생과 지식인과 야당이 지향했던 방향과는 다른 측면의 '진보정치'를 내포한다.
부산시민의 개방적 상상력을 짓눌렀던 장애물을 걷어찬 그 축제는 부산에 새로운 정신적 풍토를 조성했고
다양한 학문적 모색과 창의적 실천이 가능한 토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부산시민은 지금 부마항쟁 축제를 기억하며 열정과 상상력을 분출시켜 한국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이들과,
보수 정치의 본산 대구의 정치적 위성도시로서 권력의 파격적 분점에 안주하려는 세력들 간에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공간을 목격하고 있다.
# '친박 편중' 진상규명위원회
- 부산시민의 목소리로 진실을 말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2013년 12월 3일 국회에서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시행령이 공포되고 5일부터 시행됐지만
그동안 별 말이 없더니 부마민주항쟁 35주년 사흘을 앞둔 지난달 13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전격 출범했다.
물론 이미 2010년 7월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부마민주항쟁에서
'계엄군·경찰에 의해 학생과 시민들이 폭행을 당하여 상해를 입거나 인권 침해를 받은 점과 수사과정에서
연행된 시민학생들이 불법구금, 구타 성희롱 등 가혹행위로 인한 인권 침해를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진실화해위가 겨우 가해자 20명과 피해자 20여 명만
조사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
이제 새로운 위원회는 11월 3일부터 내년 1월 30일까지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사실피해 등에 관한 1차 접수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위원장이 대구 출신으로 법조계에 오래 종사해온 인물이고,
그동안 부마민주항쟁법 제정을 위해 노력해온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추천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임명되지 못한 사실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대구가 중심이고 부산은 주변이며
부산 시민의 목소리로 부마항쟁을 말하는 일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함을 절감한다.
장세룡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부교수
※공동기획: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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