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부산진 '野史野談']‘신발공장’의 추억

금산금산 2015. 7. 18. 11:48

'신발공장'의 추억

 

 

 

 

동천을 끼고 성장한 신발업체'6龍'…한때 세계시장 호령

 

 

 

부산 부산진구 태화고무에서 신발을 만들고 있는 근로자들의 모습. 부산진구 신발대기업은 삼화고무(범천)와 보생고무(부전), 동양고무(부암), 진양고무(부암), 태화고무(당감), 대양고무(전포) 등이었다. 부산진구청 제공

 

 

 

 

 

- 삼화 태화 대양 진양 보생 동양
- 신발업체들 하나둘씩 모여들며
- 1980년대 세계적 3저 타고 호황
- 부산 넘어 한국의 효자산업으로
- 사원 1만 명 넘는 곳도 수두룩
-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양길로

- 올초 옛 진양고무 자리 사거리에
- 금빛으로 칠한 신발동상 제막
- 잘나가던 시절은 역사가 됐지만
- 그때의 영광 두고두고 반짝일 것



나는 신발회사에 다녔다.

부산진구 범천동 소재 (주)삼화에 근무했다.

대학 졸업 직전인 1985년 12월부터 1991년 11월까지 있었다.

기획실 기획 업무를 보다가 사보 업무를 겸했다.

사보 비중이 높아지면서 나중에는 사보만 전념했다.

 '삼화 60년사' 사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신발산업의 중심지였음을 알리는 신발 모형 동상. 부산진구 옛 진양고무 신발공장터에 있다. 

 

기획 업무는 숫자가 방대했다.

억 단위 넘는 액수가 적힌 기획 서류를 종일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동종타사 기획실 실무자들을 매달 정기적으로 만나 업계 동향과

정보를 교환했다.

사보는 사내 소식을 주로 다루는 사내보라서 현장의 소리에 무게를 두었다. 현장 사람들과 술잔도 곧잘 나누었다.


업무가 그렇다 보니 사내외 발이 넓었다.

회사 안팎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신발회사는 한 곳만 다녔지만 삼화 태화 대양 진양 국제

신발회사 전반적인 현황을 숙지할 수 있었고 사무직이었지만

생산직 사원의 고충과 애환에 심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꿈에 나타난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까 국수를 먹을까 궁리하는 꿈,

내일이 사보 나와야 되는 날인데 천하태평으로 놀다가 화들짝 놀라는 꿈.

좋았던 시간도 힘들었던 시간도 강물처럼 흘러가고 이제는 기억만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나이도 그랬고 내 생애 가장 의욕적으로 일했다.

몸과 마음이 일치했고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였다.

즐거웠고 뿌듯했고 흐뭇했다.

내 인생의 한 시기를 그토록 달구어 준 신발회사에 나는 아직도 고마워하고 애착을 갖는다. 



부산진구신발회사 메카였다.

1980년대 한국의 신발 대기업은 거의가 부산에 있었다.

부산에서도 부산진구에 몰려 있었다.

당시 세계 신발시장을 석권한 게 '메이드인코리아'였으므로 부산진구 신발회사는 세계적인 기업이었다.

그런 자부심이랄지 자긍심이 신발회사 종사자에게 팽배했다.



시대 흐름이 좋았다.

3저(低) 호황이 이어졌다.

3저는 저금리, 저환율, 저유가. 금리가 낮아 돈 흐름이 좋았고 환율이 낮아 수출 채산성이 높았다.

우리나라에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석유까지 싼 가격으로 들여왔으니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기업마다 좋아 죽겠다고 아우성이었고 대기업은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신발회사는 대호황이었다.

3저 혜택을 제대로 봤다.

수출이 주력이던 신발 대기업에게 3저는 하늘이 준 호기였다.

회사마다 생산라인을 늘렸고 생산 사원을 늘렸다.

경상도나 전라도 시골 중학교 졸업식날 회사버스를 교문 앞에 대기시켜 졸업생들을 태워 왔다.

큰 회사는 산업체 부설학교와 기숙사를 갖추었다.


부산진구 신발대기업은 모두 여섯 군데.

삼화고무(범천)와 보생고무(부전), 동양고무(부암), 진양고무(부암), 태화고무(당감), 대양고무(전포)였다. 동양고무는 화승 전신이다.

삼화보생은 일제강점기부터 전국을 주름잡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부산을 먹여 살리고 한국을 먹여 살린 기업이 대양을 제외한 부산진구 신발 대기업이었다. 대양은 1976년 전포동에 터를 잡았다.


부산진구가 신발 메카가 된 데는 동천이 결정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천은 죽은 하천이 아니라 배가 다니는 운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신발회사 절대 강자였던 고무신 주원료인 고무는 전량 동남아에서 수입했고

고무 수입항만이 동천이었다.

동천 주변에서 신발회사가 성업하면서 자연히 하나둘 부산진구 신발회사는 늘어났다.

'왕자표' 신발을 생산했던 진양화학.

동천 주변에는 신발회사만 있지 않았다.

조선방직, 삼성 모태인 제일제당, 대선양조, 동명목재

동천을 끼고 세를 키웠다.

 

동천과 관련해 역사적 사실 두 가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6년 동천 준설 진정서

다른 하나는 1949년 부산을 서울처럼 특별시로 해 달라는 청원서

동천 관련 구상이다.

 

 

1936년 진정서는 조선방직과 대선양조 등

동천 주변 다섯 회사부산부윤(시장)에게 낸 것.

동천에 퇴적물이 쌓여 배가 드나들지 못해 경제적 손실이 크므로

준설해 달라는 내용이다.

1949년 청원서는 부산상의 회장이자 삼화고무 사장인 김지태 씨 등이

주축이 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가 정부에 낸 청원서

'大부산' 10대 구상 제4항이다.

동천 입구 대선양조에서 서면에 이르는 구간에 동천 운하를 개설하자는 내용이다.


부산진구 신발 대기업은 모두 각자의 브랜드가 있었다.

삼화는 범표, 보생은 타이야, 동양은 기차표(화승은 월드컵과 르까프),

진양은 진양과 왕자표, 태화는 말표, 대양은 '슈퍼카미트'였다.

라디오와 TV 광고는 신발회사 광고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요즘으로 치면 스마트폰 광고였다.

방송사나 신문사에선 광고 많이 해 줘 고맙다고 수시로 감사패를 주었다.



신발 대기업은 한 시절 대한민국 최고의 효자 산업이었다.

호황일 때 사원이 1만 명이 넘는 곳이 수두룩했다.

1만 명에 딸린 식구, 원청·하청업체, 부자재 납품회사, 물류회사, 회사 주변 상가 등

직간접 고용효과와 이윤창출을 감안하면 신발산업 공덕은 입에 닳도록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계는 있었다.

자체 브랜드로 벌어들이는 돈 대신 외국 유명 브랜드로 벌어들이는 돈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결국 이것이 한국 신발산업 발목을 잡았다.

나이키나 리복 같은 외국 업체 주문에 맞춰 생산하는 OEM은 철저하게 갑과 을의 논리였다.

갑의 눈에서 벗어나면 회사 존폐의 기로였다.

문제 제기는 물론 곁눈질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OEM 생산방식이 가진 함정은 다들 인지하고 있었다.

언론에서도 대비책을 수시로 주문하거나 제시했다.

요는 외국상표에서 벗어나 자체상표로 수출시장을 개척하고 다변화하란 거였다.

말이 쉽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해외시장 개척능력도 밀렸지만 그런 움직임을 보이면 나이키나 리복 등은 주문을 줄이거나 끊어

국내 신발업체를 '밀당'했다.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이었다.

3저에 이은 3고(高)도 발목을 잡았다.

원고, 원자재고, 인건비고의 3고가 수출산업 장래를 위협했고 신발산업 타격이 가장 컸다.

더구나 중국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후발개도국이 싼 인건비를 앞세워 추격해 왔다.


아슬아슬한 평화가 이어졌다.

1989년 1월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출범한 '한국신발연구소'

한국 신발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연구소는 품질의 고급화·다양화·부품의 국산화 등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개발 전담기구였다.

신기술과 소재, 부품 개발에 나서는 한편 전산과 자동화 시스템 구축, 표준화와

생체역학적 기능성 신발 연구에 매진했다.

신발산업을 노동집약형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기술집약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패러다임,

그 결정체가 한국 유일의 당감동 한국신발연구소였다.


신발축제도 기억에 남는다.

신발축제는 1986년부터 매년 열렸다.

부산 주종산업인 신발산업의 지속적 발전, 지역경제 활성화 도모와 신발산업 인식 제고,

그리고 신발산업 종사자 사시 진작이 축제가 내세운 취지였다.

'부산신발대축제' '신발큰잔치' 등의 이름으로 열렸다.

건강한 발, 예쁜 발 선발대회는 이후 신발아가씨 선발대회로 바뀌었고 신발가수왕 선발대회,

신발제조기능 경기대회, 신발산업 육성세미나, 신발디자인 전시대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축제가 열리면 신발회사는 전사적으로 동참하고 지원해 신발인의 유일한 축제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이후 신발산업이 도약하지 못하고 사양화로 들어서면서 유야무야 자취를 감추었다.

'부산진구가 신발산업의 중심이었음을 뒤돌아보며

더 큰 걸음으로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의지의 표상을 여기에 세웁니다.'

2015년 3월 11일 햇살 화사한 봄날 부산진구청은 금빛 나는 신발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신발 동상은 구청 인근 진양고무 자리 진양사거리에 있다.

신발동상은 그 자리가 과거 신발 대기업 자리였음을, 나아가

부산진구가 한국 신발산업의 요람임을 밝히는 기념물이다.

굴뚝산업으로 통칭되던 부산진구 신발 대기업.

신발 대기업은 역사가 됐지만 그들에 대한 추억은 금빛 동상으로 남아 두고두고 반짝일 것이다.

두고두고 금빛 추억으로 반짝일 것이다.



동길산 시인



※ 공동기획: 부산진구,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