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역설의 공간Ⅱ[현대사와 부산의 장소성]'고리원전'과 부산, 그리고 우리의 '안전'과 '생명권'

금산금산 2015. 7. 25. 21:26

'고리원전'과 부산, 그리고 우리의 '안전'과 '생명권'

 

 

 

 

박정희의 核염원 투영된 '둥근 지붕'…이젠 반핵·안전의 아이콘으로

 

 

고리 1호기가 준공된 1978년 박정희(앞줄 오른쪽) 대통령이 제어 시스템을 살펴보고 있다.

 

 

 

 

 

 

해방 후 남북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북한의 전력송전이 끊겼고, 남한은 극심한 전기 부족을 겪었다.

남한 정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경제개발에 필요한 전기공급을 위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였다.

당시 남한에서 원전은 가장 선진적이고 깨끗하고 값싼 전기 생산방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부산은 새로운 중화학 공업단지로 육성 중인 남동임해공단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고, 안보문제 때문

부산 인근의 양산군 고리는 최적의 입지조건으로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 최초로 건설된 고리 1호 원전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200배 이상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군사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장소에 건설하는 것이 필요했다.

부산은 한국전쟁에서 북의 재래식 침공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고리에 원자력 발전소들이 속속 건설되고 운전에 돌입하면서 전력수급에 숨통이 트였고,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동임해공단에는 거대한 장치 산업이 속속 건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 1호기 기공식(1971)준공식(1978)에 모두 참석해서 치사를 한 사실에서

이 원전이 당시 국가적으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고리 1호기가 완공되자 서울 광화문 앞에는 원전 준공과 5호기 착공을 축하하는 거대한 아치가 세워졌고

모든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남한 사람들은 고리 1호기가 완공되기 전까지 당시 한반도에서 컸던 북한의 수풍발전소에 큰 미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리 1호기의 발전 용량이 이에 버금가는 총 58만7000㎾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고리와 신고리에 총 7기의 원전이 추가 건설되었고, 현재 2기가 건설 중이다.

고리가 부산에 편입되면서 부산은 한국의 중추적인 전기공급단지가 되었는데, 대도시와 인접한 지역에

이렇게 많은 원전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 남북한 체제경쟁의 산물

고리 1호기 건설 당시 전경.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제공

고리원전이 건설될 당시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둘러싸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위세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남북한 모두 상대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가지지 못했고, 대다수

국민은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와 적색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한 정권은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자주국방에서 찾았다.


당시 국시였던 자주국방을 가장 쉽고 싸게 그리고 단기간에 이룩하는

 방법은 원자폭탄 보유였지만, 미국은 원자력 기술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정부는 원자력 원천기술과 우라늄을 합법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원전 건설에 집착하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중흥의 도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념탑"이라는 치사는 이런 희망과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고리 1호기가 준공될 당시 주요 일간지들은 사설에서 원자력 발전의 안전을 우려하는 내용을 일부 싣기도

하였지만, 이는 형식적인 목소리였다.

대부분 한국인은 인간의 지식과 기술로 원전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믿고 싶어 했다.

이는 원전이 가지고 있는 경제성과 효율성, 민족적 자긍심 그리고 자주국방에 대한 기대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고리 1호기 건설비는 약 1428억 원이었는데, 가동을 시작한 지 채 4년도 되지 않아 초기 설비 투자비를 상회하는 전력을 생산하였다.

이런 성과는 성과지상주의에 경도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 서구 원전은 안전문제 때문에 90% 내외에서 운전을 하였지만, 고리원전은 거의 98%에 해당하는

운전성적을 보였다.

정치인이나 기술자는 안전점검을 위한 원전의 일시적 운전중단을 커다란 경제적 손해로 받아들였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온갖 위험을 감수하였다. 현재 다양한 전문가들은 고리 1호기의 가혹한 운전조건과 노후화 그리고 배관의 피로도 때문에 운전을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후쿠시마 원전 사태, 남의 일인가

후쿠시마 원전 30㎞ 안에는 15만 명만이 살고 있었는데,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고리 원전 30㎞ 반경 안에는 340만 명의 부산 시민이 살고 있다.

대규모 원전사고가 발생하면 이 지역은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선적으로 폐쇄될 확률이 높은

지역이다(아직까지 사고를 대비한 정확한 매뉴얼조차 마련되지 못한 상태이다).

이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며, 부산 시민의 삶과 한국경제는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한국의 매스미디어는 지난 몇 년 동안 원전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고와 기술 및 설비의 부실, 그리고 은폐와

조작 등에 대한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원전 관련 최종 결정권을 가진 정부는 원전 관련 비리와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국제적인 전문가들의

검증도 거부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한국인은 우리가 원전을 안전하게 운용하기에 적합한 기술과 통제시스템 그리고 의식과 관행을

갖추고 있는지에 심각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과 시민의 생존을 위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문제제기이다.

 

 

미 웨스팅하우스사는 고리 1호기보다 4년 전에 미국에 키워니 원전을 건설하였는데, 설계수명은

고리 1호기보다 두 배나 긴 60년이었다.

미국 정부는 당초 이 원전을 2023년까지 운전할 계획이었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 투입할 비용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후쿠시마 사고 이전인 2006년에 영구 정지시켰다. 



하지만 한국 제도권의 원자력 전문가들은 아직도 대규모 원전 사고 발생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축소해서

유포하는데 열심이다.

인류의 원자력 60년 역사에서 이미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 3차례의 대규모 사고가 발생했고,

이보다 작은 사고까지 포함하면 10년 단위로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한국은 다섯 번째로 많은 원전을 운전하고 있는데, 앞선 세 사건은 한국보다 일명 '원전 선진국'에서 발생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이 아직 그 복잡하고 위험한 원전을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고리1호기 재연장 좋은가

- 잦은 고장 문제투성이…'국익'이유 침묵 카르텔, 투명한 정보공개 절실

고리 1호기가 건설될 당시 한국에는 원전 관련 지식과 기반이 전혀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턴키(일괄시공) 방식으로 1호기를 건설하였고, 국내 인력은 도로와

부지조성만을 담당했다. 가압경수로형인 고리 1호기는 초기 원전 모델인데, 건설 당시 배관과 설비의

소재기술은 초기 단계였으며, 배관과 설비는 복잡했다.



고리 1호기는 시운전 단계부터 배관과 설비 부분에서 크고 작은 고장을 계속 일으켰는데, 지금까지

발생한 횟수는 한국 원전 전체 고장의 3분의 1 이상이다.

고리 1호기는 미국 기술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한국 기술자는 초기에 고장의 원인을 찾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운전을 멈추고 열악한 배관과 설비를 모두 다 교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문제투성이였던 고리 1호기는 2007년부터 10년 연장 운전되고 있는데, 당시 이에 반대하는

정치권과 시민사회 그리고 전문가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원전에 관한 정보들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고 원전이 국가의 중요한 미래산업으로

인정받으면서 관련 전문가들은 '국익'을 위해 침묵했기 때문이다.



원전이 계속 추가 건설되면서 일부 전문가와 산업체 그리고 정치가 사이의 침묵의 카르텔이

점차 더 강화되고 있다.

현재 고리 1호기는 또 다른 10년 수명연장을 위한 실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조관연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공동기획: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