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 금강공원 '임진 동래 의총비'

금산금산 2015. 11. 25. 16:05

[부산의 비석] 금강공원 '임진 동래 의총비'

 

 

 

 

 

금강공원 임진동래의총비왜적의 총칼에 쓰러진 의로운 주검 앞에 피눈물로 새긴 기록

 

 

 

 

 

 

▲ 임진동래의총비의 앞면(왼쪽)과 비석의 유래를 설명한 뒷면 일부. 1731년 7월 동래부사 정언섭이 글을 쓰고 세웠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비석은 문자 유산이고 문화유산이다.

부산의 비석은 우리보다 앞서 부산에서 살았던 이들이 남긴 문화유산이다.

비석에 새긴 한 글자 한 글자.

어떤 글자는 피눈물 삼키면서 새겼고 어떤 글자는 잔치를 열면서 새겼다.

'부산의 비석'을 연재한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기록을 싣는다.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140년이 지난 1731년
허물어진 성곽 보수 중
남문 주변서 조각난 유해 발견
여섯 무덤에 모시면서
당대 문장가 동래부사 정언섭
애틋하고 절절한 심경 담아

 

 



'오호 차육총.'

임진동래의총비(壬辰東萊義塚碑)는 한자가 빽빽하다.

비석 뒷면 본문만 10행 250자다.

한자는 '오호'로 시작한다.

오호(嗚呼)마음이 찢어질 듯이 애달프다는 말.

찢어질 듯이 애달픈 마음을 억누르고 한 자 한 자 새기고 세운 비석이 임진의총비다.



차육총 한자는 此六塚. '이 여섯 무덤'이다.

그러니까 임진의총비는 여섯 무덤 앞에 세운 묘비다.

비석 명칭은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1592년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 유해를 모신 무덤이란 뜻이다.

의총은 의로운 무덤.

비석에 빽빽한 한자는 의총이 어째서 의로운 무덤인지 밝힌다.

 

대강은 이렇다.

'임진년에서 140년이 지난 1731년(영조 7년)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동래읍성을 쌓다가 남문 좌우에서

유해가 나왔다. 형체가 온전한 유해는 12구지만 조각조각 떨어져 부서진 것은 이루 헤아리지 못했다(기잔해지편편영락자 우불가승계, 其殘骸之片片零落者 又不可勝計). 이를 거두어 동래부 남쪽 삼성대(三姓臺) 서쪽 산기슭에 여섯 무덤으로 묻었다. 동래부사 정언섭이 썼고 신해년(1731) 7월 세웠다.'

 


삼성대내성중학교 부근 나지막한 언덕.

동래고지도엔 읍성 서문 바깥 야산으로 나온다.

삼성대 임진의총 여섯 무덤은 이후 일곱 무덤이 된다.

1788년 샘을 파다가 발굴된 유골을 새로 모신 것이다.


그런데 부산시 기념물 제13호 금강공원 임진동래의총은 무덤이 하나뿐이다.

왜 그럴까.

일제강점기 토지 개간을 명분으로 의총이 이장됐고 이장되면서 하나로 합장된 탓이다.

무덤 하나 의총은 복천동 영보단 부근에 있다가 1974년 지금 자리로 이장됐다.

유해와 함께 유물도 나왔다.

정언섭 부사 비문은 당시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금거임진 백사십여 년 이시족불삭 절극미소 적포석환재해간(今去壬辰百四十餘年 而矢鏃不삭 折戟未銷 賊砲石丸在骸間). 


경성대 부설 한국학연구소와 부산시에서 발간한 '부산금석문'에 전문(全文)과 해석이 실려 있다.

부산시가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운용하는 디지털 백과사전 '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에도 나온다.

앞에 인용한 한문 해석이다.


'지금부터 임진년까지 140여 년이나 되었는데 화살촉(시족)이 녹아 없어지지 않고 부러진 창(절극)이 삭지 않은 채 왜적이 쏜 돌과 탄환이 유해 사이에 있으니….'


비문을 쓴 정언섭 동래부사는 당대 문장가.

시와 산문이 숱하다.

동래정씨 시조로 알려진 양정 정묘(鄭墓) 묘비문도 정 부사가 썼다. 



의총비 비문은 애틋하다.

절절하다.


성명을 몰라(기성명무이고거, 其姓名無以考據) 충렬사에 모시지 못하지만 무덤을 밟지도 말며 상하지도 말거라(물천물이, 勿踐勿夷). 오랑캐 이(夷)는 상(傷)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산 백성도 당연히 돌볼 백성이고 죽은 백성도 당연히 돌볼 백성이란

목민관의 애틋하고 절절한 심정이 '물천물이' 네 글자다.

 

금강공원 임진동래의총 입구.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합장한 무덤이 임진동래의총이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동래읍성 전투가 벌어진 날은 음력 4월 15일.

그날이 순절자 기일이다.

기일이 되면 제사를 지낸다.

임진동래의총 제당은 묘비 옆 충혼각이다.

일제강점기 이전, 그러니까 원형이 전승되던 시절엔 동래읍성 남문 바깥 농주산(弄珠山)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농주산은 읍성 남문 바깥 동래경찰서 자리 언덕배기. 동래고지도에 지명이 나온다.

1740년 발간 동래부지(東萊府誌)는 동래부 주산이며 용의 형상(府主山 盤龍之形)이라며 치켜세운다.

농주산은 일제강점기 도로를 내면서 깎였다.

도로를 낸다는 명분으로 부산의 주산이 깎였고 용의 형상이 깎였다.


봉분은 단출하다.

상석 하나가 전부다.

상석 하나가 전부지만 갖출 것 다 갖춘 무덤보다 우러러보인다.

죽음을 무릅쓰고 부당함에 맞선 이들이고 비정상에 맞선 이들이다.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나도 꽤 뻣뻣한 축에 들지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당함은 뭔가.

비정상은 뭔가.

사례는 많고 많겠지만 가장 부당하고 가장 비정상 그 전형은 침략일 것이다.

부당함에 맞서 비정상에 맞서 목숨을 내어 놓은 금강공원 임진의총 동래사람들.

우리보다 몇 백 년 앞서 부산에 살았던 부산사람들.

목에 칼을 들이대도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부산정신의 총아가 임진의총이다.

'오호 차육총'으로 시작하는 임진동래 의총비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