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척화비'
흥선대원군 '쇄국' 의지 꼭 빼닮은 꼿꼿한 기상
▲ 가덕도 척화비. 서양 오랑캐와 화의하지 않겠다는 각자가 선명하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척화비는 기상이 추상이다.
서릿발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네 이놈!'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다.
허연 수염 부르르 떨며 도끼눈 부릅뜨면 누구라도 오그라들 것 같다.
사람을 얼어붙도록 감도는 냉기. 척화비는 냉기가 딴딴해져 돌이 된 비석이다.
척화비를 세우라고 한 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
조선 말기 임금 고종 아버지다.
살아서 대원군이 된 이로는 유일하다.
가덕도 공사 현장에서 출토되어
1995년 천가초등 교정으로 이전
옆에는 가덕진 수군 부대장 송덕비
신미양요 후 전국에 척화비 200기
부산에는 현재까지 3기 전해져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시련 겪어
'오랑캐와 싸우지 않는 것은 매국'
서릿발 같은 비석 글자 아직 선명
강화도에서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군이 1871년(고종 8) 4월 25일 퇴각한 뒤 팔도 방방곡곡 요지에 세웠다.
모두 200기 남짓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래부사는 정현덕.
대원군 심복 중의 심복이라서 부산에도 많이 세웠지 싶다.
가덕도 척화비는 천가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바로 옆 비석 세 기는 조선시대 가덕진 수군 부대장 송덕비.
척화비 냉기에 잔뜩 움츠린 형색이다.
임금 아버지 척화비 곁에 일개 수군 부대장 송덕비가 나란히 선다는 건 용납될 수 없는 불경.
목이 열 개라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란히 선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덕도파출소 로터리에 있었지요."
윤성도 선생은 천가초등 졸업생.
올해 일흔둘이다.
천가초등 정문 앞 파출소와 주민센터 삼각지가 옛날에는 로터리였고 거기에 송덕비들이 있었다고 귀띔한다.
'(척화비는) 가덕도 공사현장에서 출토돼 1995년 12월 천가초등으로 이전·복원하였다'는
안내판 설명을 덧대면 여기 척화비와 송덕비는 따로 있던 걸 한데 모았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송덕비 임자들, 괜히 송덕비 세워 등짝에 식은땀 꽤나 흘리게 생겼다.
기억난다.
가덕도에 거가대교가 놓이기 전 척화비 모습이.
천가초등으로 옮기기 전 척화비는 가덕도 선창마을에 세워져 있었다.
탁 트인 곳이라 바다에서도 잘 보였다.
꼿꼿한 자태가 외로우나 고고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대원군이 저랬을 것만 같았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용원 선착장에서 낚싯배를 타고 오며가며 손 흔들어 주던 기억이 새롭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척화비는 포고문이다.
방(榜)이다.
이를 어기면 몽둥이로 매질한다는 경고가 척화비였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다.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새긴 지 140년이 지났어도 한 글자 한 획 뒤틀리지 않고 꼿꼿하다.
여전히 추상이고 서릿발이다.
척화비는 대원군 쇄국정책의 절정이었다.
쇄국은 자물쇠 채우듯 나라 문을 꼭꼭 닫는다는 뜻.
서양 제국과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결기의 절정이 척화비였다.
대원군 쇄국정책에 대해선 분분하다.
말들이 많다.
쇄국하지 말아야 했단 비판이 있고 쇄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두둔이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을 터.
결과적으로 대원군 쇄국정책은 좌절됐지만 그 정신만은 산봉우리처럼 꼿꼿했고, 그리고 높았다.
대원군 생애는 굴곡의 역사였다.
당대 최고 지엄의 아버지면서도 은퇴와 복귀, 납치와 감금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다.
타협하지 않는 성품 탓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끝장이 나도록 밀어붙였다.
며느리 명성황후와 알력 내지는 갈등을 겪으면서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급기야 청일 두 나라 틈바구니에 부대끼다 시아버지는 청에 납치되고 며느리는 일본에 시해되는 풍상을 겪는다. 조선의 풍상이기도 했다.
척화비 운명은 대원군 운명과 엇비슷했다.
깨어지거나 수장되거나 매장됐다.
일본의 강압 탓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는 빌미가 되었다.
임오군란은 구식군대 차별대우로 야기된 군란이었고 가진 자의 부패와 비리가 촉발시킨 민란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개입하면서 일본 세력 배척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명성황후 요청으로 청나라가 개입하였고 대원군은 이역만리 먼 청으로 납치된다.
일본은 주동자 처벌과 거액을 손해배상을 골자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는 척화비 철거를 요구했고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가덕도 천가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비석들. 맨 오른쪽이 척화비고 나머지는 송덕비다.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에 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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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있는 척화비는 셋.
셋 가운데 둘이 매장되거나 수장된다.
가덕도 척화비가 매장되고 기장 대변 척화비는 수장된다.
부산박물관 척화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조롱거리였다.
서울인들 사정이 별 달랐을까.
조선의 중심 종로 보신각 척화비는 1882년 8월 매장되었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기면서 발굴되었다.
부산이 항을 개방한 해는 1876년.
강화도조약 결과였다.
불평등조약이었고 정치적 계산이 저변에 깔린 조약이었다.
쇄국의 반대인 개국을 택함으로써 대원군 득세를 막으려는 의도는 왜 없었겠는가.
개항하는 부산을 묵묵히 지켜봤을 부산의 척화비들.
부산의 척화비는 개항 당시의 절박한 장면들이 낱낱이 녹화된 해양도시 부산의 소중한 유산이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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