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지공원 '정묘비'
800살 배롱나무 두 그루 당당히 거느린 '동래정씨 2세조 공적'
▲ 동래정씨 2세조 정문도 공이 묻힌 정묘는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힌다. 정묘비(사진 오른쪽)가 800살 넘는 천연기념물 배롱나무 두 그루와 함께 묘소를 지킨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정묘(鄭墓)는 고려시대 묘다.
묻힌 이는 정문도 공.
동래정씨 2세조로 현종(재위 1009~1031) 때 사람이다.
증손자 정서는 유일하게 지은이가 알려진 국보급 고려가요 '정과정곡'을 썼다.
인종(재위 1122~1146)과 처남매부 사이인 정서는 유배지 수영강변에 정과정이란 정자를 짓고 지냈다.
'내 님이 그리워 우니나니 난 접동새와 비슷하요이다.'
학교 다닐 때 달달 외워야 했던 사모곡 산실이 부산이다.
동래정씨 정문도 공의 신도비
묘비 전후좌우 네 면 면적 동일
조선 최고 가문 업적 가득 담아
'조선 8대 명당' 으로 뽑히는 곳
'신선' 유명한 봉래산과 마주봐
정묘비는 정묘에 세운 묘비.
800살 넘는 천연기념물 배롱나무 두 그루와 더불어 묘소를 지킨다.
비석은 멀리서 봐도 있어 보인다.
우선은 우람하다.
그리고 이채롭다.
전후좌우 네 면의 면적이 똑같은 게 이채롭고 네 면 모두 한문이 빽빽한 게 이채롭다.
한글로 번역한 똑같은 크기 새 비석이 정묘비 앞에 있어 이리저리 맞춰 보면 해석은 무난하다.
네 면 면적이 똑같은 건 이유가 있다.
할 말이 많아서다.
면적이 같은 비석은 열에 아홉 그렇다.
빛나는 업적을 이뤘든지 빛나는 생애를 살았든지 빛나는 생애를 산 후손을 둔 덕분이다.
동래정씨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정승을 많이 배출했다.
전주이씨 22명, 안동권씨 19명, 동래정씨 17명이었다.
전주이씨는 왕실 종친, 안동권씨는 외척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 최고 가문은 동래에 있었다.
부산에 있었다.
부산시장 격인 동래부사를 지낸 이도 수두룩했다.
정묘비 명칭은 '유명조선국 동래정씨 시조 고려 안일호장 부군 묘갈.' 횡액이다.
횡액은 비석 상단에 가로로 쓴 명칭.
정묘비 명칭은 길고 어렵다.
2세조를 시조라 한 것도 그렇고 안일호장은 뭐며 부군이니 묘갈은 뭔가. 정문도는 오랫동안 시조로 모셔졌다.
그러다 2세조가 되었다.
그런 과정이 비문에 자세히 나온다.
조금 있다 설명하자.
먼저 안일호장(安逸戶長).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향리 최고위직. 일흔이 넘어 정년하면 그동안 수고했으니 안일하게 지내시라고 내리는
명예직이 안일호장이었다.
부군(府君)은 제사 지낼 때 지방에서 봤을 터.
선친이나 남자 조상 존칭이다.
화지공원 정묘비. 명칭은 '유명조선국 동래정씨 시조 고려 안일호장 부군 묘갈'이다. |
묘갈(墓碣)은 뭘까?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쉬운 것 먼저.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이 묘갈이다.
어렵다면 어렵다.
묘비와 묘갈은 엄연히 달랐다.
묘비는 고위직이 쓰던 비석이고 묘갈은 하위직이 쓰던 비석.
5품 이상이 쓰던 귀부이수 비석이 묘비고 6품 이하가 쓰던 방부원수 비석이 묘갈이다.
귀부이수는 받침대가 거북, 머리가 용이다.
방부원수는 네모 받침대, 반달꼴 상단이다.
후대에 와선 비와 갈을 구별하지 않았다.
정문도는 동래정씨 시조인가, 2세조인가.
애초 시조로 모셨다.
그러다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오래된 무덤에서 묘지문이 발견되면서 2세조가 되었다.
예부상서를 지낸 정항의 묘소였고 묘지문이었다.
묘지문 해당 구절이다.
'그(정항)의 아버지 정목은 태부경에 올랐고 할아버지 정문도와 증조부 정지원은 동래군 호장을 지냈다.'
이로써 시조는 정지원이 되었고 정문도는 2세조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시조로 표기한 것은 하루아침 2세조라 칭하기가 머쓱했으리라.
(전문은 '부산금석문' 책자나 디지털 백과사전 '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 '부산금석문' 참조)
정묘비는 신도비(神道碑)다.
신도비는 신이 다니는 길목에 세운 비.
신이 강림하는 곳이 비석이라 여겼다.
신도비는 통상 묘소 동남쪽 길가에 세웠다.
정묘비 비문 또한 신이 다니는 길목에 묘갈을 세웠음을 명기한다.
'묘계지남십허보 치석이갈지(墓階之南十許步 治石而喝之).'
묘 계단 남쪽 10걸음쯤에 돌을 깎아 묘갈을 세웠다는 뜻이다.
신이 다니는 길목은 지금 철망 울타리로 가로막혀 있다.
울타리 너머 보이는 오솔길이 곧 신도이며 옛길이다.
신도비 세운 조상님 깊은 뜻을 헤아린다면 길을 가로막는 철망 울타리는 과유불급이다.
정묘 자리는 명당자리.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힌다.
상여가 산에 이르렀을 때 눈 녹은 자리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어 묏자리로 정했다.
정묘 맞은편은 신선이 산다는 영도 봉래산.
1년 365일 신선과 마주하니 명당은 명당이다.
명당 덕분인지 동래정씨는 고려와 조선 양조에 걸쳐 발복했다.
비문은 1732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썼다.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공원에 있다.
시내버스 33, 44, 63, 179번을 타고 정묘사에서 내리면 된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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