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전동 '금정산성'복설비
▲ 금정산성복설비는 금정구 장전동 벽산블루밍 아파트 2단지 안에 공원을 겸한 문화재보호구역에 있다. 받침돌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어도 한 발짝도 밀리지 않을 만큼 크고 굳건하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금정산성복설비(復設碑)는 호방하다.
호방하면서 수수하다.
부산사람 호방하면서 수수한 기질을 그대로 빼닮았다.
매사 듬직하고 시원시원하며 겉치레를 꺼리는 부산사람 기질이 복설비를 낳았고
복설비는 부산사람 기질을 한 푼 에누리 없이 사방팔방 만방에 드러낸다.
대형 받침돌 합쳐 높이 285㎝
부산에서 가장 높은 비석
1806년 부임 동래부사 오한원
금정산성 복원 후 비석 세워
현재 아파트 단지 안에 보존
받침돌 커서 원래 자리 지켜
복설비 높이는 185㎝.
야구선수 강민호 같다.
비를 받치는 받침돌은 높이가 1m 넘는 거대한 자연석.
받침돌까지 합치면 부산에서 가장 높은 비가 금정산성복설비다.
안내판에는 '부설비'로 나오지만 복설비가 정확하다.
국어사전에도 그렇게 나오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그렇게 나온다.
금정산성복설비는 사적비다.
사적비는 성곽이나 다리 등 토목공사 전말과 의의, 수고한 사람을 밝힌다.
무관심으로 허물어진 금정산성을 다시 쌓고(復設) 난 뒤 세운 비가 복설비다.
'동래부가 점령되더라도 영남을 지키는 튼튼한 성이 필요하다'는 동래부사 상소를 받아들여
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과 공사기간과 내역, 소요재원 등이 상세히 나온다.
비석 명칭 '금정산성복설비' 일곱 자는 횡액전제(橫額篆題)다.
설명이 좀 필요하겠다.
비석 명칭을 제액(題額)이라 한다.
세로로 쓰면 종액(縱額)이고 상단부에 가로로 쓰면 횡액(橫額)이다.
전제는 전서(篆書)로 쓴 제액.
횡액전제라 하면 비석 상단에 가로 전서로 쓴 명칭이란 뜻이다.
'내지치 처동남해상 위도이로 동국지요충 임진지변 성불수 천곡송공사지 수장구입성.'
16행 비문의 시작 대목이다.
원문을 보자.
萊之治 處東南海上 爲島夷路 東國之要衝 壬辰之變 城不守 泉谷宋公死之 遂長驅入城.
내(萊)는 동래, 도이(島夷)는 섬 오랑캐, 천곡(泉谷)은 동래부사 송상현 호다.
'동래부 관할지역은 동남쪽 바닷가에 걸쳐 있어 섬 오랑캐가 들어오는 길이 되니 우리나라 요충지다.
임진년 변란 때 성을 지키지 못하고 천곡 송상현 공이 죽으니 왜적이 대대적으로 들이닥쳤다.'
(전문과 해석은 '부산금석문' 참조).
비문 전반부 요약이다.
금정산성복설비의 명문. |
금정산성은 계미년(숙종 29년·1703) 처음 창건된다.
둘레가 9천200보였다.
그 뒤 성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결국 산성을 폐지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폐허가 되었다.
병인년(1806) 내가 이 고을 태수가 되어 산에 올라 옛 터를 둘러보니 오랜 시간 방황하며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는 당시 동래부사 오한원이다.
오한원은 1806년 2월부터 1809년 2월까지 꼬박 3년 동래부사를 지냈다.
동래부사 임기는 900일.
초대 이윤암부터 마지막 지석영까지 동래부사 256명 가운데 임기를 다 채운 이는 20명 남짓이다.
동래가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변경이고 오랑캐와 분쟁이 잦은 접경이기에
이 핑계 저 핑계 일찌감치 임지를 벗어나려 했다.
뚝심의 부사 오한원은 승승장구했다.
요직을 두루 거쳤다.
동래부사 때 쌓은 왜관 일본인 교역경험을 살려 1814년 관세청을 창설했다.
한국 관세청 창시자가 오 부사다.
폐허가 된 성터를 차마 떠날 수 없었던 오 부사는 상소를 올렸고 복설하라는 윤허가 떨어진다.
복설 과정은 비문 후반부에 나온다. 대략 이렇다.
정묘년(1807) 늦가을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 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다음해 초봄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 오는(정묘계추 토목계흥 일월동문성 취년맹춘 운주량어백리, 丁卯季秋 土木繼興 一月東門成 翌年孟春 運柱樑於百里) 등 149일이 걸려 서남북 초루가 완성되었다.
성은 평탄한 곳에서 시작해 산 정상에서 그쳤다.
동서 32리에 이르렀다.
완공하자 부역한 동래사람들이 즐거이 달려왔다.
복설비 소재지는 금정구 장전동 벽산블루밍 아파트 2단지 안.
공원을 겸한 문화재보호구역에 있다.
금강공원 의총비에서 나와 왼쪽 식물원으로 방향을 잡고 20분쯤 가면 벽산블루밍이다.
비석을 받친 자연석 받침돌은 엄청 크다.
고을 백성 다 달라붙어 밀어도 단 한 발짝 밀리지 않을 만큼 크다.
부산의 비석이 대부분 자리를 옮긴 반면 복설비가 제 자리를 지키는 이유다.
받침돌 하단부에는 다수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공사 비용을 댄 기부자들로 추정된다.
동래부 동헌이 있던 동래에서 금정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비석을 세웠으므로
복설비 자리가 산성으로 가는 옛길이다.
옛길은 그렇게 복원되고 역사는 그렇게 이어진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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