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어사암·어사비'

금산금산 2015. 12. 23. 14:51

어사암· 어사비

 

 

 

 

 

억울한 백성 보듬은 암행어사의 공덕 새긴 갯바위

 

 

 

 

 

 

▲ 기장군 죽성리 갯가에 있는 어사암 바위. 바위에 새긴 암행어사 이도재와 기생 월매 이름은 지금도 선명하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어사암은 갯바위다.

기장군 죽성리 갯가에 있다.

깊지는 않지만 바닷물 찰랑거려 물이 빠져야 건너갈 수 있다.

가까이 가면 바위에 새긴 이름이 둘 보인다.

하나는 이도재(李道宰)고 하나는 기월매(妓月每)다.

이들은 누구며 왜 여기 이름을 새겼는가. 

 

 


 
고종 시절 암행어사 이도재
기장군 식량난 조정에 보고
백성들 갯바위에 이름 새겨

사비로 둑 세우고 청렴한 생활
백성들 공적비에 생일까지 기념

 

 


 
이도재(1848∼1909)는 조선 고종 때 사람이다.

왕조실록을 검색하면 161건이 나온다.

고종실록 156건이고 순종실록 5건이다.

왕조실록에 100번 넘게 나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 유명한 동래부사 송상현은 87번이 나오고 조선의 청백리 이안눌이 81번 나오는 정도다.

이도재 생애가 당대에서 대단히 주목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이도재 이름 석 자를 새긴 돌은 부산과 근교에 셋 있다.

셋 다 이도재를 기린다.

 죽성리 갯바위가 그 하나고 나머지 둘은 비석이다.

한 비석은 기장읍성 송덕비들과 함께 있고 한 비석은 양산향교에 있다.

일반인에겐 이름도 생소한 사람을 부산지역에선 왜 그리 칭송했는지 궁금증이 인다.


이도재는 암행어사였다.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가 되어 부산 기장과 양산을 비롯 영남 일대를 암행했다.

기장 암행은 볏섬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나라 곳간에 들어갈 양곡을 실은 배가 기장 앞바다에 침몰했더란다.

굶주려 지내던 주민들이 양곡을 건져 먹었더란다.

주민들은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

피해를 과장하는 바람에 가져간 것보다 더 물어야 했다.

가혹행위로 죽는 이까지 나왔으니 원성이 자자했다. 급기야 암행어사가 납셨다.

 

 


기장읍성 이도재 송덕비. 박정화 사진가 제공

 

 

암행어사 내사가 시작됐다.

관아에 들렀고 감옥에 들렀다.

소문이 났고 주민들은 관기 월매에게 간청했다.

시중들 기회가 오면 주민들 억울함을 있는 그대로 알려 달라고.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기회가 왔다.

마을에 들른 어사를 사고현장이 잘 보이는 갯바위로 안내했다.

열아홉 월매가 어사를 모셨고 주민들 억울함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다.

억울함은 풀렸고 주민들은 어사 손길이 닿았던 바위에 어사암 세 글자를 새겼다.

글자가 흐릿해지자 일제강점기 '이도재'와 '기월매'를 다시 새겼다.

요모조모 잘 살피면 어사암 세 글자도 보인다. 



고종실록에 암행어사 이도재 보고서가 인용된다.

1883년(고종20) 9월 23일 실록이다.

기장 볏섬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심각했던 식량문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찬찬히 읽으면 마을 주민들이 볏섬을 건져 먹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방금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도재의 별단(別單)을 보니 경상좌도 환곡 폐해가 다른 도에 비해 가장 심하다.

횡령 환곡을 조사해서 받을 수 없는 것은 탕감해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은 독촉하여 받아 실제 수량을 채우고

각 읍에 고르게 나눠 줘야 한다.'


고종이 암행어사 이도재를 독대한 기록은 등골에 땀이 밴다.

1883년 6월 2일 실록에 나온다.

독대하면서 보고서를 올렸고 죄 지은 경상좌도 벼슬아치들이 줄줄이 거명된다.

죄를 물은 벼슬아치는 다음과 같다.

밀양부사 영천군수 풍기군수 군위현감 기장현감 칠곡부사 양산군수 의성현령 영해부사 황산찰방.

 이름은 생략한다.

"생사단은 고마움의 표시죠. 1년에 한 번 생일날 공덕을 기렸습니다."



기장읍성 송덕비 명칭은 어사이공도재생사단.

기장문화원 황구 실장은 제사 드리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생사단(生祠壇)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산 사람이라 제사 대신 생일날 공덕을 기렸다고 덧붙인다.

제액 양옆으로 4언시를 새겼다.

우리 고을에 왜 이리 늦게 오셨나. 영원히 기리오리다.

그런 내용이다. 비음에 세운 연도가 나온다.

계미(1883) 봄에 세웠다. 



양산향교 송덕비 제액은 어사이공도재영세불망비다.

양산에서 어사 활동을 하는 내내 공직자 청렴한 자세를 견지했고 재난 방지용 둑을 사비로 지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이 이 송덕비다.

기장 송덕비처럼 제액 양옆에 시를 새겼다.

둑을 쌓아 줘 고맙다는 내용이다.

비음에 세운 연도가 새겨져 있다.

암행어사로 다녀간 지 10년이 지난 1903년 3월 세웠다.

양산향교 이도재 송덕비. 박정화 사진가 제공

 

이도재는 후덕했고 강직했다.

아래로는 후덕했고 위로는 강직했다.

칭송과 유배, 복권, 사직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학부대신 때는 단발령에 반대해 사직했으며 외부대신 때는

러시아가 영도에 석탄창고 기지를 짓는 게 부당하다며 사직했다.

1908년 총리대신 이완용 모함을 받아 죄인 취급을 당했다.

이듬해 별세했다.

묘소는 전북 옥구에 있다. 



순종실록 1909년 9월 25일자 '종1품 이도재가 죽다' 기사는 이도재 생애가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 직접 한 말이다.

'강개하고 결백하며 현저한 업적을 나타냈다.

짐이 의지했던 사람으로서 벼슬자리에 있을 때나 물러갔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고를 듣게 되었으니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