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의 또다른 얼굴
해양대 있는 조도, 1950년대엔 국내 최대 밀수소굴
- 밀반입 환경 좋아 폭력조직 침투
- 어촌 주민 80~90% 포섭돼 가담
- 1960년 세관 초소 들어서자 근절
자연의 퇴적작용에 의해 육지화가 된 섬이 해운대 동백섬이다.
이런 섬을 육계도(陸繫島)라 부른다.
반면 부산항 입구의 조도는 인공적으로 뭍이 된 섬이다.
본래의 섬 특성을 잃었기 때문에 이들 섬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륙도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조도는 멀리서 보면 여전히 섬의 형태를 잃지 않고
부산항의 이면의 역사를 품고 있다.
조도는 1967년 방파제 공사로 육지와 이어지고, 1974년 6월에는 한국해양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서
캠퍼스단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섬이 1950년대 말에는 우리나라에서 둘도 없는 밀수소굴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면 놀랄 것이다.
현재 한국해양대가 들어서 있는 조도. |
한국전쟁이 끝나자 사회가 불안하고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면서
극성을 부린 것이 대마도 이즈하라(嚴原)항에 거점을 둔
해상특공대밀수였다.
이름 그대로 특공대밀수는 일부 권력기관과 폭력조직이 관여하면서
악랄하기로 소문났었다.
1959년 당시 조도는 90여 호에 약 5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이러한 마을이 갑자기 밀수조직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다.
조도는 시내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데다 인근에 부산항의 외항선 묘박지가 있어
밀수품을 양륙하는데 그만이었다.
이러한 환경조건을 익히 알고 있던 밀수조직들은 세력 확장을 선점하려고 섬 주민을 포섭하는 등
물밑경쟁이 뜨거웠다.
덩달아 주민들도 생업보다 고생을 덜하고 수입이 짭짤한 밀수에 끌려들어
나중에는 주민의 약 80~90%가 발을 들여놓았다.
고기잡이배는 밀수품 운반선으로, 어구 창고는 밀수품 창고로 둔갑을 하면서
남편이 양륙밀수품을 창고에 숨겨두면, 아내는 이걸 세분해서 국제시장 등으로 반출하는 운반책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노부모에게도 망 보는 역할까지 주어지면서 가족 모두가 밀수라는 생업에
긴장과 흥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외곽에서 관망하던 조직폭력배가 직접 이곳 섬에 발을 뻗치면서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폭력으로 주위를 제압한 이들은 대부분 집에 지하비밀창고를 설치하는 등 섬 전체를
흉악한 밀수소굴로 변모시켜 나갔다.
더욱이 섬 주민마저도 이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정보가 새어 나오지 않아 세관을 비롯한 관계기관에서 첩보활동을 펼치는데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듯, 보다 강력한 밀수단속을 펼치는 것만이
이들의 철옹성을 허무는 일이었다.
드디어 1960년 2월 2일 이곳에 세관초소를 설치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처음에는 흉기를 들고 대항하는 등 저항이 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권력 앞에 밀수조직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이들이 하나둘 꼬리를 내리게 되면서 섬에는 서서히 평온이 회복됐다.
오늘날 조도에는 예전의 그런 흔적을 읽을 수가 없다.
이곳이 우리나라 미래의 해양일꾼을 키우는 산실로 바뀐 지 괘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열기만 넘쳐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실감나는 현장이다.
부산세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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